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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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리다 배경을 관련해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작가의 개인사를 알지 못하지만 읽으면서 그녀가 플로리다 출신이거나 적어도 꽤 오랜 기간 그곳에서 거주했을 거라는 짐작이 들 만큼 플로리다에 대한 물리적, 서정적 묘사는 무척 섬세하다 (작가는 뉴욕 출신임을 다 읽은 후에 알았다).  
 
 
불안증을 달래기 위해 밤산책을 나가지만 살고 있는 동네는 빈집이 많고 강간과 폭력 범죄가 빈번이 일어나는 곳이다. (유령과 공허)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가 군대 입대한 사이에 모자는 이사를 하지만, 돌아온 아버지로부터 잡혀오고 결국 엄마는 떠난다. 홀로 남아 아버지의 폭력과 방치 등 온갖 학대를 견뎌낸 주인공 내면에는 가족의 상이 형성되지 못한다. (등근 지구, 그 가상의 구석에서)
외딴섬에 가족도 없이 남겨진 어린 두 자매. (늑대가 된 개)
남편의 갑작스런 볼일로 인적 드문 외진 캠핑장에 두 아이들과 남겨진 주인공은 낙상으로 머리를 다치고 꼼짝하지 못한다. (미드나이트 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유복한 가정환경의 친구를 질투하는 어맨다, 아내의 친구를 사랑하는 맨프레드, 숨막힐 듯한 플로리다를 떠나고 싶은 그랜트. (사랑의 신을 위하여, 신의 사랑을 위하여)
지친 일상과 플로리다를 벗어나 낯선 나라, 살바도르에서 보내는 휴가. 헬레나는 섹스 파트너를 구하며 하루하루를 즐기지만, 우연히 마주한 태풍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없다. (살바도르)
한때는 대학강사였으나 장학금을 놓친 것을 계기로 부랑자가 된 제인. 노숙자, 청소부,  급기야 매춘까지 감행하지만 경찰에 구속된다. 어떻게 해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위와 아래)
젊은 시절 꽤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 연애했지만, 강간에 가까운 성관계를 강요당했던 '나', 어느날 불법이민자로 보이는 다친 여성에게 도움을 주려 했으나 거칠게 거부당한다. (뱀 이야기)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 때문에 도망치듯 플로리다를 떠나 두 아들과 함께 이포르에 온 그녀. 주인공은 기 드 모파상 취재와 휴식을 목적으로 프랑스로 날아왔건만 달라진 건 없다. (이포르) 
 
  
 
사람은 인생이 꼬이거나 문제가 생기면 환경 탓을 한다. 
부모 혹은 남편을 잘못 만나서(물론 사실 이련 경우도 있다), 돈이 없어서,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등 많은 핑계들을 진실처럼 인정한다.  
 
그러나 극단의 문제(폭력, 학대)가 아니고서는 이를 해결할 방법은 대체로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쉽게 깨고 나오지 못하는 고정관념과 트라우마, 문제의 원인에서 자신을 제외시키고 회피하려는 의식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 
 
흑인과 가난한 자들이 사는 지역도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며, 낯선 곳에서 호의를 베푸는 남성의 직업이 고작(?) 상점 주인이라고 해서 불온한 마음을 먹었다고 볼 수 없다.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긍정적 경험이 없다고 해서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압박과 권태에 대해 진솔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인생의 가치관을 세워놓지 않은 채 대상을 상대로 한 끊임없는 비교는 상실감만을 안겨줄 뿐이며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념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이라고 규정되어진 삶의 방식이 정답이 아님을 깨닫지 않는 한 우리는 온전히 자립된 인생을 살기 힘들다.  
 
학대받은 어린 시절을 지나 사고로 청각 장애까지 안게 되지만 가정을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가족을 이룬 주드처럼,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걱정했던 동네에서 별일 없이 아이들을 키워내고 늙어가는 것 처럼, 권태에 빠져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어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미나처럼, 낯선 사람의 호의를 호의로 받이들이게 된 헬레나처럼,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낸 제인처럼 인생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삶은 엄청나게 대단하지도, 보잘 것 없지도 않다. 각자 나름의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동반해 살고 있으며, 사소한 기쁨으로 그 불행을 위로 받는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이야 학교에서 늘 배우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 '내'가 타인을 외모로 점수를 매기듯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한 인간의 일생은 기나 긴 역사 안에서 보면 찰나일 것이며,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먼지 한 톨 만큼의 크기도 아닐테다. 놀라운 발전을 이룬 인류의 업적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세월의 한 부분임을, 우주의 한 원소임을 종종 상기한다면 삶의 고통 또는 권태로움의 가운데를 지나기가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한 번의 호흡이 끝나고 다음 호흡이 시작되는 사이 정지된 모든 순간이 길다. 그러고 보면 늘 전환의 순간에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내일이라도 곧 아이들은 어른이 될 것이고,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남편과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어다닌 그 모든 시간과 내 몸과 내 그림자와 달에 더해서, 우리가 소리지르지 않고 소리지를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무게 아래 웅크리고 있는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외로운 인간은 너무 작고, 달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기에 우리 삶은 너무 순식간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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