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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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영도

'공주님'이라고 불릴만큼 마마걸인 딸 유비가 하루 아침에 연락이 닿지 않는다.  사위 사사 도모키는 아내가 장모와의 갈등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며, 현재는 치료와 안정을 위해 정신과 클리닉에 입원해 있다고 알려줄 뿐 일체의 면회를 사절할 뿐만 아니라 딸과의 전화 통화조차 막아놓은 상태. 이를 납득하지 못하는 하코자키 시즈코는 딸의 안전과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사립탐정사무실을 찾는다.  

 

화촉

한 예식장에 같은 날 시간차를 두고 예약된 두 예식이 모두 어그러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쪽은 신부가 도망가고, 한쪽은 신랑의 전 여자친구가 나타나 신랑 대기실에서 성관계 도중 발각된다. 이십대 초반인 신부는 집안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예순 살이 넘은 남자와 마지못해 결혼을 결정하고, 다른 예식의 예비 신랑은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리적으로) 양다리였으며 결혼식에서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이 두 결혼식, 뭔가 수상하다. 같은 날, 같은 예식장에서 예정된 두 예식 모두 파혼이라니!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모녀가 어린 아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며 탐정사무실을 찾아온다. 아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바로 아들의 친할머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혼한 전 남편의 어머니다. 등교길에 칠십대 노인의 운전 미숙으로 일어난 교통 사고. 모든 상황과 증언, 근거는 단순 사고임을 말하고 있는데, 오직 구치다 미키는 전 시어머니의 사주라고 억지를 부린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 ■ ■ ■ 

 

동네의 골목 사립탐정 스기무라가 의뢰받은(정확히, 의뢰는 두 건, 한 사건은 어쩌다 보니 휩쓸리게 된) 세 사건을 중편소설로 엮은 옴니버스 소설집이다. 

위의 세 사건은 체육계 혹은 남성 집단의 서열화와 그에 대한 폐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의해 함몰되는 가족의 붕괴, 특히 여성을 향한 혐오와 인권유린을 다루고 있다. 

  

 

<절대영도>에서는 같은 대학 재학생, 졸업생으로 구성된 필드하키 동아리에서 선배(다카네자와 데루유키)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 사생활은 아예 인정되지 않는다. 양해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이 후배의 집으로 쳐들어가는 건 예사고, 회원들(특히 후배)의 연인이나 부인을 불러내 술시중 뿐만 아니라 저속한 농담과 음담패설, 외모 비하 등 여성 혐오를 드러내며 하대하고 희롱 및 성추행까지 한다. 이란 모임이 싫어서 탈퇴를 결심한 다마키 고지의 집으로 속임수까지 써가며 쳐들어가 결국에는 그의 아내를 집단 성폭행하고 자살로 몰고 간 '그' 집단을 다마키는 응징한다.  

 

소설에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다카네자와가 가장 나쁜 사람일까(사실 그는 이 소설에서 거의 절대악이다)? 가족보다 선배의 말을 더 우선하며 자신의 아내를 희롱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선배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아내가 지켜보는 곳에서 후배의 아내를 집단 강간하는 도모키는 정상인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배만 아니면 멋진 남편이기에, 남편이 시키는대로 변죽을 울리는 유비는 같은 여성으로서 갖는 수치심과 모멸감 따위는 길에 내다 버린 것인가!

 

사실 이렇게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집단에서 학연 지연에 의한 따돌림과 여성의 성폭행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가까운 사례로 학연으로 갈등을 겪어 러시아로 귀화한 A 선수, 얼마 전까지 코치의 성추행 사건으로 떠들썩 했던 S 선수 등 어렵지 않게 접하는 사회 문제다. 특히 여성의 성적 수치심을 이용해 상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는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가. 특히 최근에 n번방 사건처럼 큰 이슈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앞으로 학생을 가르칠 예비 선생인 교대 남학생들조차 카톡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외모 비하와 성희롱을 일삼았다. 이러한 행위들이 얼마나 일반화 되어 있는지 생각하면 우려되는 부분이 많다. 지금, 자신의 단톡방을 점검해 보는 건 어떨지...... . 

 

 

<화촉>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선택보다 돈을 우선하는 부모로부터 결혼을 강요받는 스가노와 엄마를 오랜 죄책감과 피해의식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시즈카, 두 여성이 등장한다. 16,7세기 이전에는 여성이 사람이기보다는 물건, 상품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이름을 내놓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가문의 명예나 권력에 의해서 결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효사상을 으뜸으로 치는 지역에서는 수절이 영광이고, 재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허락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는 여전히 결혼을 결심한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다. 부모는 자식의 배우자가 될 사람의 집안 내력, 학력, 심지어 연봉까지 물어본다고 들었다. 사실 가장 개인적인 부분을 부모라는 이유로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월권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자식의 결혼을 허락하고 말고가 어디있나? 물론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본인들의 선택인 것을. 부모로서 먼저 살아온 연륜으로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결정은 본인들의 선택이고 부모의 몫은 축복으로 끝내야하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어느정도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든, 이겨내든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엄마의 피해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결혼식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는 엄마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냉정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안고 가야 하는 삶의 무게는 각자 짊어져야 한다. 자식 혹은 부모의 짐을 대신 지는 것, 타인에게 짐을 지우는 것,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짐으로 인해 사는 것이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두가 혼자서 배를 저어 시간을 강을 나아가도 있다. 따라서 미래는 항상 등 뒤에 있고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다. 강가의 풍경은 멀어지면 자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는 무언가라고.  

p301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서는 다 남 탓인 두 여인이 있다. 언니 미키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이른 나이부터 소위 '문제아'였다. 사고를 일으켜 관심을 끌고 동정을 얻어내며 외모를 이용해 남자를 유혹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음에 있어 남편도 자식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라는 듯 더 자극적이고 강하게 꾸미고 행동한다. 덕분에 십대에 아이를 낳고, 결혼 후에 다시 출산을 하지만 사실 두 아이 모두 아빠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동생 미에는 학생 시절부터 언니의 추문과 나쁜 평판으로 인해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누구의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고, 그 언니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뒤통수를 당겼다. 내가 원해서 그녀의 동생이 된 것도 아니고, 언니와 자신은 다른 사람인데, 아무도 두 사람을 별개로 보지 않았다.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 하지만 미에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을까. 

 

461.

아무리 괴로운 과거라도 그건 당신의 역사에요. 어제의 당신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당신이 있고, 당신의 내일이 있는 거예요.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행복한 미래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아요. 

 

자신의 '어제'를 한번도 선택할 수 없었다는 미에의 비명. 미에의 말대로 '어제'는 선택할 수 없지만, '내일'은 선택할 수 있지 않나. '내일'은 곧 '모레'의 어제. 이 사실을 미에가 알았더라면 언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려나...... .  

모쪼록 미키의 딸 사자나미만큼은 엄마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 좋은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스기무라 탐정.

필립 말로의 고독한 분위기도, 엘리리 퀸의 천재적 추리도, 셜록의 젠틀한 면도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따뜻한 인간미가 전해지는 새로운 캐릭터다. 소설에서 스기무라의 추리나 수사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면이 좀더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스기무라 탐정의 건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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