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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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이 남자가 궁금해졌다. 

□ □ □ □

 

어느해 8월, 지갑에 9만8천원 뿐인 채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마흔다섯 살 남자. 구인란을 뒤지다가 컨테이너 숙소가 제공되는 영세 택배 업체에 취직한다.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힘들어도 타인과 대면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서. 

 

그 남자가 맡은 구역은 행운동. 그래서 동료 택배 기사들은 그를 '행운'이라 부르고, 누군가 그에게 이름을 물어오면 '행운'이라 부르라고 말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타고난 소질도 없고, 의지도 없는 남자. 남의 일상에 관심도 없을 뿐더라 상대의 관심도 불편하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그의 일상에 침입자들이 불쑥 나타난다.  

 

운동 1688번지대의 작은 벤치에 정오를 지나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차림ㅡ청바지, 흰 티, 뉴욕 양키즈 야구 모자ㅡ으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성. 어느날 그녀는 차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문 그의 차로 다가와 나중에 한꺼번에 갚겠다며 담배 한 개비를 꾸어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담배 한 개비 씩 꾸어가던 얼마 후, '춘자'라고 이름을 밝히며 매주 일요일에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면 일당 백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유는 죽은 남편이 '행운'과 너무 닮아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만 그녀의 지난 날 병력과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마지못해 수락한다.

 

 

'행운'은 노상방뇨 중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 마이클(행운이 즉석에서 붙여준 이름)을 100번지 비탈 동네의 인적 드문 곳에서 10대 무리에게 맞고 있을 때 구해준다. 이후 '행운'이 그 동네 택배를 돌 때마다 1시간여를 따라다니는 마이클이 왠지 싫지 않아 그와 함께 요깃거리를 나누곤 한다.  

 

 

요일 마지막 배송지 Bar '코카인'. 저녁 8시 이후에 배송해 달라는 부탁으로 일을 마치고 술도 가볍게 한 잔 하는 곳. '행운'은 그곳 종업원이 게이인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저 술만 마시고 나오니까. 그리고 그들이 게이라는 것보다 숨겨진 더 큰 사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행운'은 폭력배와 형사에게 고역을 치르게 된다. 

 

 

역에서 폐지를 줍는 삼십 대 초반 여성 '마스크'(물론 이것도 '행운'이 붙인 이름이다). 우연찮게 아파트 경비원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는 그녀를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마주칠 때마다 잠시 양갱을 나누며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된다.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도박 중독자인 아버지로 인해 차츰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져 그저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그녀를 향해 '행운'은 말한다. 

 

살아요. 죽지 말고. 부탁이에요.

 

언제부터인가 폐지를  줍는 마스크를 볼 수 없다가 한참 후 우연히 달라진 모습의 그녀를 본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고개를 돌리는 '마스크'. '행운'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 쉬는 시간. 휘청거리는 노인을 잡아주자 그 노인은 '행운'에게 말을 건넨다. 몇 마디 대화 후에 대뜸 금요일 저녁 8시까지 자신의 집으로 저녁 식사와 경제철학을 배우러 오라는 말을 남긴다. 아흔이 넘은 퇴직한 학자. 손녀를 통해 알게 된 그들의 가족사. 놀라는 것도 잠시 손녀는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하고 '행운'은 정중히 거절한다. 

 

 

장 동료 '남현동(택배 구역이 남현동이라서 남현동이라고 불린다)'. 아버지의 장례로 결근해야 하는 그 대신 일을 맡은 '행운'에게 답례를 하겠다며 술자리를 청한다. 두 사람 모두 묵언수행하는 스님 못지 않게 말이 없다. 무거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행운'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에 말을 시작하는 '남현동'.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 유서를 통해 알게 된 오해. 아무에게도 풀어놓을 수 없었던 회한을 '행운'에게 풀어놓고 자유롭게 떠나는 '남현동'.

  

 

 외에도 살갑게 다가오는 청림과 주창, 그리고 다른 이들. 빚에 팔려간 연인의 어머니를 구할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오고, 가난한 살림에 여섯 식구의 생계를 택배만으로는 감당이 안되어 사채를 쓰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면서 정작 병원에는 가지 못하며, 가장으로써 가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그들.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 작정하고 달아난 도박 중독자 사장때문에 모두 살 길을 찾아 제각각 흩어진다. 

 

다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선 남자. 

 

 

 

■ ■ ■ ■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오히려 깊은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속내를 꺼내놓는다.

가족이 힘이 아닌 짐이지만 섣불리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특히 우리나라는 유교적 관습으로 그 성격이 강하다). 남편은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철썩같이 믿었건만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며 배신감만 안긴다. 그저 자기 세계에 갇혀 자식에게는 관심이 없는 무정한 아버지라 여겼는데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그의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했을 줄이야! '나'의 확신이 나'만'의 확신이라는 것, 그 확신이 상대 뿐만 아니라 주변인 모두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안타까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해서 얻어진 불화. 사실 이 모든 일의 기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다. 

 

 

등장 인물들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말들을 '행운'의 앞에서는 술술 뱉어낸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행운'은 말이 없다. 조언이나 충고 따위는 물론이고, 위로도 하지 않는다. 그저 듣는다. 다만 사이사이 재미없고 건조한 농담을 던질 뿐.

 

친절하지 않은 무뚝뚝한 말투, 미운 말은 다하고 결국에는 지고마는 헛똑똑,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소질. 거기에다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하는 재미없는 농담. 독자인 나조차도 이 남자에게 마음이 감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설에서는 끝까지 '행운'의 미스터리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소설 사이사이마다 전해지는 하드보일드 풍의 분위기와 '행운'의 손놀림과 등장인물 들과의  대화, 그의 지성과 마지막 장면의 통화를 통해 독자가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주인공 '행운(K)'에게서 필립 말로의 쓸쓸함과 고독이 왜 떠올려졌는지 알겠더라는. 한국의 새로운 하드보일드 작가의 출현이려나. 앞으로 '정혁용'이라는 사람이 계속 글을 쓰고 책을 낸다면 나는 앞으로 꾸준히 찾아 읽을 예감이 든다.  

 

 

 

[소설 속으로] 

 

 

60.

연민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동정으로 전락하고.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할 권리가 없다. 

 

180.

밤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뒷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도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성난 전화도 무서워해본 적 없고, 직장 동료나 모르는 남자의 성희롱을 견딘 적도 없고, 남자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힘들여 쟁취한 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관습과 싸워 얻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살아온 이의 공포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전 누군가를 짐작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요.

 

205.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 알고 싶지만 알고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의 일상은 사막이다.

연민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동정으로 전락하고.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할 권리가 없다. - P60

밤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뒷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도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성난 전화도 무서워해본 적 없고, 직장 동료나 모르는 남자의 성희롱을 견딘 적도 없고, 남자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힘들여 쟁취한 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관습과 싸워 얻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살아온 이의 공포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전 누군가를 짐작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요. - P180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 알고 싶지만 알고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 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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