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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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라면, 나는 분명 사람을 죽이고 말 거야...... .

첫문장

 

 

1992년.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중학생 노노미야 쿄코 앞에 전학생으로 나타난 사촌 가모우 미치루. 쿄코는 아름다운 외모와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로 남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미치루의 도움으로 학교 폭력에서 벗어나고, 재생불량성 빈혈로 쓰러진 후 그녀의 골수 기증으로 이식 수술까지 성공해 건강한 삶을 얻게 된다. 미치루를 향한 동경을 넘어 이제는 그녀와 동일시 되고 싶은 쿄코. 그러던 어느날  미치루가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과 성적 학대를 받는 현장을 목격한 쿄코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미치루의 계획에 동참한다. 

 

 

2006년.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해소해 왔던 사기누마 사요는 쇼핑 중독에 걸리고 그에 따라 재정의 한계에 도달한다. 카드 돌려막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직장인 은행에서 사퇴를 강요받을 수 있는 처지까지 내몰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창회에서 만난 쿄코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생활 플래너 미치루.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뿐만 아니라 불법이 아닌 편법을 돌려 말하며 사요에게 공금횡령을 은근슬쩍 조언한다. 사면초가에 놓인 사요는 미치루의 컨설팅을 받아들이고 빚을 갚은 후 쇼핑 유혹에 다시 빠지고 만다. 어느새 횡령 금액은 2억 엔이 넘어갔고, 본사에서 감사가 나온다는 쿄코의 정보에 차명계좌를 확인하자 통장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미치루와 쿄코. 

  

 

2007년.

대학을 졸업하고 여든아홉 번 구직에 실패한 노노미야 히로키는 아버지 회사인 산업폐기물처리 업체에서 일한다. 어느날, 사정상 두 달 정도 집에 머물기로 한 미치루를 집에서 마주한 순간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매료된다. 스물아홉 살에 경영인이라는 타이틀을 단 미치루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그녀 앞에 남자로서 당당해지기 위해 자립하리라 결심한다. 며칠 후 누나인 쿄코와 미치루의 성애 장면을 목격하고, 다음날 미치루로부터 놀라운 고백을 듣는다. 또한 그녀는 히로키가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인다. 히로키는 미치루를 위해, 그녀의 남자가 되기 위해 장도리를 손에 쥔다.  

 

 

2012년.

남편은 2년 전 정리해고를 당한 후 재취업은 고사하고 느닷없이 작가가 되겠다며 히키코모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후루마키 요시에. 아무리 절약해도 점점 조여오는 생활고에 지쳐간다. 직장 동료에게 푸념 아닌 푸념을 털어 놓자 그녀로부터 생활 플래너 상담에 대해 듣게 된다. 소개받아 간 자리에는 미치루라는 삼십 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이 나와있다. 컨실팅을 떠나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그녀의 위로에 감동한 요시에. 두번째 만남에서 미치루가 건넨 조언은 두 가지.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것, 현재 모은 자산의 가치를 높일 것. 그런데 여기서 자산의 가치를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요시에는 남편을 자산의 가치로써 활용할 수 있을까? 

 

 

경찰 다카도노, 아소의 집요한 추척으로 꼬리가 잡힌 미치루. 그들이 제시한 증거물을 확인 후 변호사 선임을 요구하고, 그녀가 지목한 변호사는 의외로 형사 재판의 이력이 전혀 없는 호라이 가네토다. 그녀는 왜 경찰.검찰이 꺼리는 베테랑 형사 재판 변호사가 아닌 민사 전문 변호사를 선임한 걸까? 

 

재판 현장에서 벌어지는 반전의 반전 쇼.

그녀는 희대의 악인인가? 치밀한 플래너인가? 아니면 천재인가? 

 

 

 

■ ■ ■ ■ 

 

 

소설은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존속 살해, 쇼핑 중독, 금융 사기, 보험 살해 등 자극적인 소재와 극단적인 사건 진행을 보여 준다. 그러나 소설에서조차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매체를 통해 보도 되고 있다.

 

돈을 주지 않는 노부모를 살해한 아들, 딸에게 성적 학대를 가하는 생부, 수입을 초과한 소비 생활 때문에 쏟아져 나오는 신용불량자,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 혹은 남편을 살해하는 부부, 고객의 돈을 임의로 차용해 개인적으로 사용하다가 적발된 금융업 종사자.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 들은 미치루에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넘어간다. 아니 뻔히 보이는 이 수작에 넘어간다고? 하지만 정작 미치루의 무기는 아름다운 외모도, 1급 플래너라는 직함도, 뛰어난 지능도 아닌 피해자들의 약해진 마음을 읽어낼 줄 아는 능력이다. 

 

부모조차 못 알아본ㅡ따돌림과 학교 폭력으로ㅡ피폐해진 마음을, 전문대를 졸업한 후 쉴 틈 없이 동료보다 몇 배 더 고군분투하며 살아왔건만 돌아오는 건 승진 누락에 대한 허무함과 고단함을, 루저 취급을 하며 멸시하는 가족들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자존감과 좌절을, 생계는 뒷전이고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며 자식 미래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감수하면서 혼자 아둥바둥 하루하루를 버티는 고통과 괴로움을, 미치루는 알아준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미치루는 속삭인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죄가 없다고, 인정하고 기다려줬다면 너는 능력을 발휘했을 거라고, 너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너를 꺾어 벌레 취급하고 기회를 박탈한 건 그들이라고,  그러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하라고. 

 

피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의 공통점은 주변인들과 소통의 부재다.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학교 폭력을 혼자 감수하는 쿄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과한 노동량을 출세를 위해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사요, 누나인 쿄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민을 가족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진정성을 담아 나누지 않는 히로키, 남편을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그저 돈을 벌어오는 포지션으로 단정하고 딸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조차도 짐작만 할 뿐 대화하지 않으며 또한 남편이 가정에서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까지 혼자 결정하는 요시에.

사치성 쇼핑은 열심히 일한 나에게 면죄부가 되고, 타인의 화려한 일상은 동경에 머무르지 않으며, 복수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킨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요는 돈이 곧 행복이라고 단정짓는다. 돈은 아무리 벌어도 만족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세상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와 비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무나 식상하게도 공감과 이입이다.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미치루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년 동안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오면서도 다른 사람의 그림자에 숨어, 한 번도 사건 표면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여자 

p379

 

이는  미치루에게만 해당할까?

우리는 살면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유혹을 받는다. 사소하게는 불필요한 쇼핑 목록, 마음이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편한 심기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 복권, 널 뛰듯 뛰는 주식 시장, 부동산 시장, SNS에서 보여지는 타인과의 괴리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공금 횡령을 하고, 가족을 죽이고, 친구를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남들도 다 그래'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있는 나의 또다른 이면은 없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가모우 미치루는, 모든 이들의 내면 저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언제든 튀어 올라올 기회를 보고 있다. 그러니 방심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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