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없겠지만 - 완화의학이 지켜주는 삶의 마지막 순간
캐스린 매닉스 지음, 홍지영 옮김 / 사계절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죽음 조산사다.

그리고 늘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p206

 

완화의학 전문의가 다양한 임상 경험을 사례로 들어 쓴 에세이자 임상 기록이다. 저자는 신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환자와 가족의 정서적 고통까지 함께 하며 그들이 임종을 삶의 마지막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준다. 저자와 함께 하는 팀원들은 환자를 돌봄으로써 언젠가는 누구나 맞닥뜨릴 죽음이 결코 두려운 순간이 아님을 대화를 통해서 풀어간다. 

 

책에서 다룬 인상적인 사례를 몇 가지 얘기하고자 한다. 

 

중년이 채 되지 않은 여성 홀리는 심부전 말기로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항구토제를 복용함으로써 그 부작용으로 활동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며칠 동안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잠을 자지 않으며 떠들어대는 통에 가족들도 지쳤다. 그녀의 신체 상태라면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대로라면 어느 순간 숨을 멈춰버릴 것이다. 홀리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된 저자는 그녀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주고, 그 사이 충동을 가라앉힐 약을 호스피스에서 가져온다. 그 약을 주사하는 순간, 홀리는 깨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가족에게 미리 알려준다. 홀리 또한 예감을 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 딸들과 최고의 시간을 보냈음을 감사하며 평화롭게 임종을 맞는다.

심부전 말기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던 어느날, 구토가 멎고 활기가 돌아온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그것은 과속하는 자동차처럼 삶의 시간을 더 앞으로 당겼을 뿐이라는 사실에 더 아픔이 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시간이 좀 지나니 침대에서 맥없이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남겨주지 않은 것에, 어쩌면 홀리는 더 행복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겠다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에릭은 '운동신경세포병'을 진단 받고, 손주들에게 병약하고 초라해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살을 결심한다. 교통사고로 위장하려고 했지만 팔에 마비가 와 운전이 불가능해지고, 약을 먹는 것을 시도하려 했지만 혼자 몸을 가눌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이것도 실패, 곡기를 끊는 방법을 선택하려는 때에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고통이 너무 커서 치료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된다. 이로써 세 번째 방법도 실패. 시쳇말마따나 그야말로 웃픈(웃기지만 슬픈) 상황.

저자는 에릭과 대화를 통해 진정으로 그가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자신이 제대로 보호자 역할을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에릭은 어떻게 되었을까? 봄에 진단을 받은 그는 가족들과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나는 봄에 자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그때 죽었다면 많은 것을 놓쳤을 거라는 에릭의 말에 그가 몇 달 동안 충분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나 역시 그의 자살 실패가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름다운 샐리, 끝까지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으로 방어기제를 사용했던 여성.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이 죽음으로써 가족이 겪을 아픔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 외면을 선택한 그녀. 저자가 내린 처방은 그녀가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선택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까지 암을 이겨낼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난 어차피 죽을텐데 나만 생각하면 어때?'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도 충분히 그런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하고. 다만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면 임박한 순간에는 남아있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발랄하고 긍정성으로 무장한 샐리를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은 어땠을까, 짐작해 본다. 

 

 

말기암으로 죽음을 앞둔 아내. 남편은 아내에게 병명을 숨기고, 아내는 자신의 병명이 암일뿐만 아니라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숨긴다. 서로의 충격과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사실을 감추고 연기를 하는 부부. 저자는 두 사람에게 각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서 혼자 고통받지 않도록 터놓고 이야기하라고 조언한다. 두 사람은 아픔을 함께 나누며 긴 대화와 눈물로써 정화의 시간을 갖는다.

난 일단 아프면 내 몸뚱아리만 걱정하는 부류라서....... . 더 나이가 들고 많은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나보다는 가족을 더 생각하려나?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존엄사가 합법적인 네덜란드. 영국인 우잘은 네덜란드에서 직장에 종양이 있다는 진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인지한 우잘은 집에서 가족들과 남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네덜란드 의료진은 우잘에게 말기암의 엄청난 고통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님을 강조하며 몰아붙이듯 존엄사 여부를 묻는다. 이에 자신의 의사를 귀담아 듣지 않는 의료진에 불쾌한 우잘은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저자와 상담한다.

존엄사, 개인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각자의 몫, 이는 당연히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은가. 환자의 고통과 인내를 의료진이 함부로 재단할 바는 아니며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할텐데...... .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무슬림 부부 바트와 남리타의 사례와도 비슷한 맥락에 있는 듯 하다. 실체와 과학으로써 접근한 의사로부터 자신들의 종교를 존중받지 못했다고 여긴 두 사람은 치료와 약 처방을 거부한다. 이는 정신과 혹은 심리적인 치료가 아니더라도 의사와 환자, 그리고 환자의 가족까지 라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영국의 경우 호스피스 병원이 반드시 임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장소로만 사용될 뿐만이 아니라 치료를 위해 방문하기도 한다는 것, 또한 완화 의학에 인지 행동 치료와 사별 전문가도 별도로 있다는, 그래서 임종을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

 

나는 죽음이 두렵다. 생명이 단절되는 것이 무서운건지, 잊혀진다는 게  두려운 건지, 아직은 죽음을 대상으로 두려움의 근원적 실체를 모르겠지만 삶의 질 만큼이나 죽음의 질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 앞에 회피하지 않는 진솔한 대화와 감정의 공유.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 전 지구적 전염병으로 모두가 힘든 시기다. 살기 위해,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죽음에 무감각해지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책 속으로] 

 

23.

우리가 매년 축하하는 것은 삶이 시작된 날이지만, 살아있음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삶이 끝나는 날이다. 

 

69.

누구가와 사별한 사람은 설사 그것이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 그 경험을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79.

임종 자리는 곧 끝을 맞이할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자리이자, 가만히 지켜보며 귀를 기울이는 자리이다. 그리고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 무엇이며, 다가오는 이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원히 바꿔놓을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이다.  

 

220.

완화의료를 제공하는 우리는 어떤 가정도 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대신 직접 물어본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기꺼이 대답한다는 것, 그리고 이 짐을 나눠서 질 때 임박한 죽음에서 유용한 통찰과 발상을 새로 발견한다는 점이다.

 

221.

죽음을 죽음이라 부를 수 없다면 어떻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을 위한 돌봄을 계획하고, 우리가 남기고 떠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요? 

 

389.

개인의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뿐이다. 병에 걸린 사람은 삶이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노인이 신체적 한계를 더 오래 사는 대가로 받아들인다. 많은 이가 병보다 외로움이 훨씬 견디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것을 외면한다. (...) 가장 취약한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그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척도다. 

 

 

높은 고도에서 풍경을 내려다보듯

바라보면서 삶의 모든 부분이 연결되어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나의 생애'에서 / 올리버 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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