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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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느 리즈는 프랑스 보리바주 호텔 128호실 협탁 서랍에서 원고를 발견한다. 소설의 내용에 깊이 빠진 그녀는 작가가 실수로 두고 갔다고 여겨 156쪽에 기재되어 있는 주소로 편지와 함께 소설을 보낸다. 그러나 원고의 주인인 실베스트로로부터 돌아온 답은 그녀를 매우 놀라게 한다. 
 
그 소설을 쓴 사람은 실베스트로가 맞지만, 그 원고는 33년 전 그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분실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미완의 원고였고, 그것이 삼십 여년이 지나 완성된 원고로 안느 리즈에 의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다는 사실. 이에 안느는 캐나다에서 잃어버린 원고가 어떤 과정을 거쳐 프랑스 바닷가 호텔 방 협탁 서랍에 있었던 건지 추적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제 안느는 하나둘 공범을 끌어들여 색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강간으로 인해 임신을 하고 아이를 입양보낸 후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우울증을 겪는 나이마, 용기가 없어 짝사랑하는 여성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청년 로메오, 한때는 교수였으나 도박 중독으로 가족을 놓치고, 안느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어머니의 외도를 알게 된 윌리엄, 사랑하는 여인과의 미래를 꿈꾸던 바로 그 순간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은 다비드, 치매로 기억을 잃었지만 무의식에서도 사랑하는 그의 이름에 반응을 보이는 드니즈, 청소년 시절 부모의 부재로 방황을 했던 엘비르, 젊은 시절 병약한 몸 때문에 사랑했던 연인을 보냈지만 잊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가 된 작가 클레르, 교통사고로 인해 남편과 뱃속의 아이를 잃은 후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기, 공황 장애로 삶의 의욕을 잃고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실베스트로.
  
위의 인물 들은 대부분 원고를  한 번 쯤은 읽었고, 이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소설 내에서 원고의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원고를 쓴 이가 청년이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담은 연애소설이라는 정도만 짐작할 따름이다. 그래서 독자는 원고의 어떤 내용으로 인해 그들이 삶을 위로 받고 정화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에서 주요 인물들은 원고를 읽은 사람들이 아닌,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한두가지 아픔을 안고 살 듯이 실베스트로를 비롯한 등장인물 대부분은 크고 작은 사연이 있다. 그들은 서로서로 편지를 통해 오히려 가까운 주변인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했던 스스로의 민낯을 털어놓으며 추처럼 달고 있었던 짐을 조금씩 내려놓고 자신도 모르게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중심에는 물론 안느가 있다. 버럭버럭 화를 내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실베스트로를 당근과 채찍으로 설득하고, 마기와 윌리엄 사이에서 두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원고를 추적하기 위해 홈즈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대상을 설득하고 앙해를 구하며 이해시키기 위해 편지를 쓰고 또 쓴다. 안느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물론 직업적 성향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녀는 사람과 세상에 애정이 많은 사람일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연에 일일이 교감하고 글을 나눌 수 없을테니 말이다. 냉소적인 내 친구라면, "다 살만하니까 하는 짓이야."라고 하겠지만. 사는 게 마냥 좋기만 한 사람도 없고, 마냥 좋다고 하더라도 안느처럼 마음 쓰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마음. 
 
요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전자계정을 사용한다. 그래도 연말카드나 축하카드 정도는 여전히 손글씨를 쓰고 있고, 마음이 동할때는 연필로 꽉꽉 눌러 써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일기는 지금도 따박따박 손으로 쓰고 있고. 한때는 우표를 백 장씩 사놓고 사용할 떄도 있었는데... . 그래서 나는 편지가 주는 위력을 충분히 납득한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2016년임을 감안하면, 시대착오적인 소설일 수도 있다. 전화, 문자, 이메일 등 불과 몇 초만에 전송이 가능한 혁신적인 통신시대에 손편지라니, 가당키나한가 (일단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원거리에 있는 그들이 안느의 편지에 반응을 했던 건 그녀의 성실하게 눌러 쓴 글자 하나하나 때문일테다.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면 나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동참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소설에 들어가기 전에 지명과 인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실제했던 일임을 명시한다. 그저 낭만적인 허구로 여겨졌을 등장인물의 위안과 평온이, 그리고 그들이 어딘가에 실제한다는 사실에, 나는 독자로서 기쁘다.
 
 
 

살면서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것들은 진통제도 듣지 않는 만성 통증처럼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답니다. - P25

기억을 갉아먹는 암 덩어리만큼 비열한 게 또 있을까? - P145

우리는 왜 사춘기 때만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걸까요? 나이 먹은 사람들은 오히려 아직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듯 더욱 망설이잖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 P286

소설이라는 배가 우리를 태우고 멀리까지 데려가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고 우리를 영원히 변화시킨다는 것도 알죠.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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