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이탈로 칼비노 전집 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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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없이 매춘부 누나와 사는 핀은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부랑아 소년이다. 핀은 친구들에게 거미들이 집을 짓는 곳을 알려주거나 막대기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하며 무리지어 돌아다니고 싶지만 어른들 세계가 익숙한 핀을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라곤 어른들의 이야기 뿐인 핀은 그저 어른들의 세계로 몸을 '숨긴다'. 그렇다고 어른들의 세계라고 해서 핀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선술집에서 벌어지는 온갖 음담패설과 농담, 조롱에는 핀에게 한 자리를 내주는듯 하지만 정작 그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에도 아이라는 이유로 배제시킨다. 이럴 때마다 핀은 혼스러움을 느끼며 외로움을 안고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배회한다.  

 

35.

핀은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아이였고  어른들의 놀이에도, 아이들의 놀이에도 끼지 못하는 아이였다. 

 

어느날, 누나를 찾아온 독일군인의 권총을 훔쳐 자신의 안식처인 거미집이 있는 곳에 숨긴 핀. 그러나 들고 다니던 권총허리띠 때문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지만, 그곳에서 레지스탕스 '빨간 늑대'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탈출 직후 뜻하지 않게 빨간 늑대와 헤어진 핀은 길을 잃고 헤매다고 또 다른 유격대원 '사촌'을 만나서 그가 속해 있는 '오른팔네 파견대'에 가게 된다.  

 

그곳에는 독수리 바베우프를 키우는 요리사 '왼손잡이', 그의 아내 질리아, 호텔 종원업 출신으로 파견대의 대장인 '오른팔', 독서를 즐기는 '나무 모자', 무기와 여자에 열중하는 펠레, 현병대에서 탈영해 레지스탕스가 됐지만 여타 부대에서 그를 거부해 오른팔네 파견대로 오게 된 '헌병', 땜장이 출신 자친토, 동서 지간 네 명이 모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는 '공작' '후작' '백작' '남작'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출신도, 유격대에 들어온 이유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욕설과 고함만 질러대는 선술집의 남자들과는 다름을 느낀다. 

 

102.

핀이 보기에 인간이란 존재 안에는 벌레처럼 구역질 나는 어떤 것과 친구를 끌어들이는 따뜻하고 친절한 어떤 것이 함께 들어 있었다.  

 

138.

그(제나)는 부르주아나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각자 되도록 적게 일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세상을 더 좋아했다. 

 

141.

"각자 자기가 왜 유격대원이 되었는지 알아야 해. (...) 난 이제 시골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 그랬다간 녀석들이 날 체포해 버릴 테니까. 게다가 폭격 때문에 전부 다 부서져 버렸거든. 이 때문에 우리가 유격대원 노릇을 하는 거야. 다시 땜장이로 돌아가서 싼값에 계란과 포도주를 살 수 있고 체포당할 위험이 전혀 없고 경보를 울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서지.(...)" 

 

전투를 위해 야영지를 떠날 준비를 하는 오른팔네 파견대. 자신도 전투에 참여할 거라고 믿는 핀은 흥분하지만 역시나 파견대 남자들도 그는 갈 수 없다고 말한다. 뒤쳐진 오른팔과 함께 여단에 도착한 핀은 나쁜 늑대와 조우한 기쁨도 잠시 오른팔네 파견대는 무장 해제 당한다.  

  

핀은 숨겨놓았던 권총을 찾기 위해 거미집을 찾아가지만 이미 누군가 파내간 뒤였고, 이에 낙담하고 누나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핀의 권총을 그토록 탐내 훔쳐간 펠레는 결국 네라에게 그 권총을 선물로 주고 갔다. 핀은 그 권총을 뺏다시피하여 집을 다시 나오고 언제나 혼자일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거미집에서 울고 있을 때 '사촌'과 재회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반딧불 속을 걸으갔다. 

 

 

작가가 자신의 레지스탕스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말엽에 나치 독일 점령군과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파시스트 들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해방군이라 불리는 레지스탕스의 전쟁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면면을 살펴보자. 선원이나 땜장이, 독서를 즐기는 지식인 등 각 계층의 보통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사촌, 오른팔, 나무 의자, 왼손잡이, 나쁜 늑대처럼 소설 내에서 이름이 없다. 또한 부대가 해산할 거라는 소식에 핀은 부대원 각자가 부대를 만들어 대장이 되라고 말한다. '나무 모자'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유격대원들의 부대를, '헌병'에게는 부모들을 잡아들이는 파견대를, '공작'에게는 토끼 목 자르는 부대를, '왼손잡이'에게는 화냥년 남편들의 파견대를 만들라고 말이다.

그들은 왜 이름대신 별칭으로 불리며, 핀은 그들에게 이토록 어처구니 없는 부대를 만들라는 우스갯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보면 혁명이나 저항운동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독립투쟁으로 후세에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얼마나 되랴. 그 수많은 저항자와 투쟁자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현재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부여할 수 없어 다수의 나쁜 늑대, 다수의 나무 의자, 다수의 왼손잡이, 다수의 사촌을 내세운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령관 페리에라와 위원 킴의 대화에서 작가는 킴의 입을 빌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말한다. 

 

"인간들은 모두 투쟁하지, 그들 속에는 똑같은 분노가 자리 잡고 있어. 각자는 모두 서로 다른 자신이 하나가 돼서. 여기엔 오른팔 같은 놈도 있을 수 있고 펠레 같은 놈도 있을 수 있지...... . 자네는 그들이 얼마나 값진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할 거야...... . 어쨌든 그들도 똑같은 분노를 가지고 있지...... . 아무도 아닌 일이 그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어...... . 이게 바로 정치 작업이야...... .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 (...) 내일이면 사망자도 생기고 부상자도 생기겠지. 그들도 그걸 알아.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고 무엇 때문에 그들이 싸워야 하지? 내게 말해 주겠나? 봐, 여기엔 농부들도 있고 산악 지대에 사는 주민들도 있어.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아주 간단해. 독일군들이 동네를 불태우고 젖소들을 끌어가 버렸으니까. 그들의 전쟁은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전쟁, 즉 조국을 지키려는 전쟁이야. 농부들에겐 조국이 있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늙은이든 젊은이든 마을 전체가 자기들의 볼품없는 총을 들고 무명 사냥복을 입고 우리와함께 싸우는 거야. 우린 그들의 조국을 지켜 주는 거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지. (...) 그들(검은 여단)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게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자손들을 해방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고 더 이상 분노가 섞이지 않은 맑은 인간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이용될 거야. 그러면 그 속에서 사악해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저들은 쓸모없는 몸짓들, 무용한 분노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비록 승리했다 해도 그건 쓸모없고 무용한 것들이지. 그것들은 역사를 만들지 못하고, 자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분노와 증오를 되풀이하고 영속시키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이야.(...)" 

p153-157

 

핀은 애초에 왜 총을 훔친걸까?

핀은 총을 소유하게 되면 남자 어른들의 세상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항상 어른들과 친구로 지내고 싶었으며 농담을 지껄이며 자신을 믿어주기를 바랐고 좋아하는 어른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고 싶었다. 그러나 핀의 기대와는 달리 어른들은 총이 있다는 핀의 말을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까지 했다.  

 

 

핀에게 있어 어른들의 삶은 술먹고 싸우고 거드름과 허세를 피우며 여자를 희롱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다 어떨결에 정치범이 되어 감옥에 들어가고 나쁜 늑대를 만나게 되면서 다른 세상을 만난다. 그 세상 또한 핀이 진입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이지만 그곳에는 삶과 죽음이 실재한다. 허허실실 농담을 던지고, 그 농담에 화를 내기도 하고 웃어주기도 했던 사람들이 전투에서 하나둘 전사한다. 능력을 평가 받고 무장 해제를 당하며 서로 다른 생각으로 파시스트가 되고 레지스탕스가 된다.

핀은 이제 예전처럼 피에트로마그로와 함께 골목 안 가게에서 다시 구두를 고치고 싶지만 골목은 텅 비었고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감옥에 갔거나 죽어버렸다. 핀은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할 수 있나? 갈 곳을 잃은 핀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울음 뿐이다. 

 

거미집은 위에서 언급했듯 핀의 유일한 안식처다. 핀은 진짜 친구를 만나게 되면 그 친구에게만 거미들이 집을 짓는 장소를 보여준다고 다짐했었다. 그렇다면 '사촌'과 핀이 거미집에서 재회하고 손을 잡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쁜 마음에 핀이 거미구멍을 보여주겠다고하자 사촌은 거미를 걱정해 사양한다. 그리고 그는 핀을 어린아이가 아닌 자신과 동등한 친구로서 대우하고 어른들 세계에서 부정적인 모습에 이골이 난 핀에게 세상에 아름다운 이면이 있음을 알려 준다.

이는 핀이 어린아이로의 회귀가 아닐까. 다시말해 핀이 핀으로서, 농부가 농부로서, 학생이 학생으로서 살아갈 세상의 도래를 희망함이 아닐까하는. 

 

"여자들은 모두 그래요, 사촌...... ." (...)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야. 우리 어머니는...... ." (...)

"반딧불이가 많구나."

"반딧불이도 가까이에서 보면 역시 불그스레하고 구역질 나는 벌레일 뿐이에요."

"그렇단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아름답잖니." 

  

 

작가의 서문을 읽으면 그가 이 소설을 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름 없는 소시민이이자 저항자요 투쟁자였던 그들의 삶을 전하고픈, 동료들을 향한 그의 깊은 애정이었음을.

 

 

독서와 삶의 경험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우주가 아니라 하나이다. 해석될 수 있는 삶의 모든 경험은 독서를 부르고 그 둘은 뒤섞인다. 책들이 항상 다른 책에서 탄생한다는 것은 또 다른 진실, 즉 책은 실제 삶과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탄생한다는 것과 표면적으로만 모순되는 진실이다.

'작가의 서문'에서 p233

 

 

그는 외로웠고, 어른들의 삶을 이루는,피와 벌거벗은 몸뚱이로 된 이야기들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느꼈다. - P22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린아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어른들을 즐겁게 해 주거나 짜증나게 하는 그 무엇으로 취급되는 어린아이로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핀도 어느 날엔가 어른이 될 것이고, 그러면 모든 이에게 심술궂게 굴 수도 있고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복수할 수도 있으리라. 핀은 지금 당장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니, 어른이 안 되어도 좋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 남아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감탄하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되어서 어른들과 함께 대장 노릇하며 기막히게 멋진 모험을 하고 싶었다. - P207

핀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맺혔고 그는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어른들은 이상하고 배신자 같은 족속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이들의 놀이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른들에게도 아주 진지한 자신들의 놀이가 있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놀이 속의 놀이 말이다. 아까는 낯선 남자와 더불어 독일이네 대항해서 놀이를 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자기들끼리 그 낯선 남자에 대항해서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절대 믿을 수가 없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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