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나 1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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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간단한 책소개를 접했을 때에는 중상류층 이상의 집안에서 자란 똑똑한 여학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겪게되는 인종차별에 대한 극복과 성장, 이라고 짐작했다. 
 
예상을 전혀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 이페멜루 가족의 경제 상황이 넉넉치 않았다는 점, 가난한 유학생으로 시작했다는 점, 인종차별은 흑인 인종 차별에 집중했다는 점 등이 조금 달랐다. 
 
소설은 십삼 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머리를 땋기 위해 흑인 머리 전문 미용실을 찾아가는 이페멜루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3인칭으로 쓰여진 소설은 이페멜루와 그녀의 첫사랑인 오빈제의 관점을 교차해가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보통의 나이지리아 가정에서 성장한 이페멜루. 똑똑한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교수들의 장기간 파업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는 우주 고모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가기로 한다. 연인인 오빈제와의 이별을 비롯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비자 심사가 바로 통과되어 유학 길에 오른다. 도착한 미국. 하지만 걱정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 어려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학업과 양육을 병행하며 고군분투 중인 우주 고모, 연금 번호도 불법으로 타인의 것을 빌려써야 하며, 무엇보다 일자리가 나지 않아 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황으로 몰린다. 오직 어린 육촌 동생 디케만이 위로가 된다. 때마침 권유 받은 아르바이트. 비록 성관계를 직접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의뢰자의 성적 만족을 위한 행위에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오빈제와의 연락을 끊는다. 이후 가정 보모 자리를 구하면서 수입이 일정하게 되자 안정을 찾아간다. 학위를 마치고 부유한 백인 남자 커트와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블레인과 사랑하지만 나이지리아로 귀국을 결정하면서 그와도 이별한다. 
 
이페멜루를 미국으로 보내고 어느날 연락을 끊어버린 그녀로 인해 상심은 커지고 심리적으로 방황하던 오빈제. 그의 어머니는 학회 참석을 위해 가게 될 영국행 명단에 아들을 보조 자격으로 이름을 올린다. 체류 비자는 6개월. 그 이후는 오빈제의 몫임을 분명히 한다. 오빈제는 그곳에서 살아내고자 발버둥쳤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위장 결혼. 하지만 승인 마지막 순간에 불법 체류자로 검거되고 본국으로 추방되어 돌아온다. 권력의 힘을 알게 된 오빈제. 권력자의 비리를 비판하고 주관이 뚜렷했던 오빈제였건만, 그는 이제 친척의 도움을 받아 '치프'의 비위를 맞추며 부를 쌓는 사업가가 되었다. 더없이 아름답고 순종적이지만 맞춤형 아내 로봇같은 아내 코시와 예쁜 딸 부치가 있지만 오빈제의 삶은 공허하고 외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이 떨려오는 그녀, 이페멜루가 이곳, 나이지리아로 돌아온다. 13년만에! 
 
57(1).
그녀(코시)는 모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동시에 양쪽을 편들고 있다. 그녀는 늘 진실보다 평화를 택했고, 늘 다수의 의견을 좇았다. 

 
 
 
소설은 이페멜루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스무살 무렵에 자국을 떠나 삼십대 여성이 되어 돌아 온 이페멜루는 미국에서 지내면서 직접 겪은 흑인 차별에 대해 블로그를 통해 써내려간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차별과 혐오, 조롱 뿐만 아니라 대화에서 전해지는 뉘앙스와 분위기 등 내밀한 부분까지 전달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비미국인을 포함한 미국 내 흑인들에 대해 칼럼 형식의 포스팅을 하는 이페멜루의 블로그는 비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바라보는 미국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그들의 정체성까지 짚어낸다.  
 
블로그 계정을 처음 개설하고 올린 글에서 이페멜루는 인종 문제에 대한 해법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이 드물기에, 미국 사회가 미국인 흑인과 미국인 백인 사이의 그것을 더 드물게 만들기에, 미국의 인종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연인의 사랑을 빗대고 있는데 인류애로 읽어야하는건지 싶다. 그렇다면 이페멜루가 미국 대학에서 영화 '뿌리'를 보고 토론했던 내용들, 흑인을 물건처럼 사고 파는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을테니까.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의아스러웠던 점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미국 내 흑인의 인권 신장이나 평등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이페멜루의 태도다. 도서관 경비원 화이트씨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증거없이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된 사건에 대해 시위를 하기로 한 블레인은 동참을 권유했지만(사실, 그는 이페멜루의 참가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녀는 다른 장소에 있었다. 잊어버렸다는 거짓말로. 
 
196.
그녀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단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학교 도서관 앞에 서 있는 것보다 캐버나의 환송회에 가는 것이 더 좋았을 뿐이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미국 시민권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러한 시위가 인종주의를 더 부추긴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마음가는대로 살고싶은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이였을까.
어쩌면 그녀는 이런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면서 구별지어지는 것이 진절머리나서 귀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 경쟁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페멜루는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있어 그녀는 귀국을 결정한다. 
 
결혼 상대자가 있고 고수익을 올리고 있는 상태에서 귀향을 결정하는 이페멜루. 그녀는 고향 라고스에서 비로소 '흑인'이 아닌 삶으로 돌아와 안정감을 느낀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열악한 인프라, 여전한 가난, 사회적 도덕성의 결여가 판을 치더라도. 결국 이페멜루가 찾던 것은 정체성인가...... . 
 
나이지리아로 돌아온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만남. 그들은 서로를 통해 그동안 억지로 감추고 눌러왔던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소설의 후반부, 두 남녀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페멜루만큼은. 그녀가 오빈제의 경제력에 기대지 않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온전한 성장과 독립을 이뤄내려한다면 일단 혼자 일어서보는 것은 어땠을까. 물론 그가 혹은 그녀가 있어야 자신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가정 내에서 억압에 대한 개인의 성장이었다면, 이 소설은 범위를 넓혀 흑인들 (특히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가리키며, 그 안에서 순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작가도 작품과 함께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한 여성의 성장기에 그치지 않는 성장 소설이다.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

 (p133-2)

 

 

 


 

그녀가 어떤 신용 카드를 발급받을 자격이 된다는 그 안내문에는 그녀의 이름이 우아한 이탤릭체로, 철자도 맞게 적혀 있었다. 그 편지는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 줬고, 그녀를 좀 덜 투명 인간 같게, 좀 더 존재감 있게 만들어줬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 - P224

평생 영어를 써 왔고, 중등학교 때는 토론 동아리 회장을 맡았고, 미국식 발음은 뭔가의 미완성형 같다고 늘 생각했던 그녀가 오그라들거나 움츠러들어선 안됐지만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몇 주간, 가을의 스산함이 내려앉는 동안에 미국식 악센트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 P226

내가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가난한 흑인과 가난한 백인‘이 아니다. ‘흑인과 가난한 백인‘인 것이다. 실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81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침묵을 택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국에 와서 흑인이 되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의 세상이 거즈에 쌓인 것 같다고 느꼈을까? (2권) - P118

그들의 삶은 고집스럽게 희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용실을 열고 싶어 하고, 대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자신의 차례가 올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우리, 에어컨이 있는 중산층의 삶을 사는 우리는 이 빈민가의 삶에서 겨우 한 발째 떨어져 있다고 쓰고 오빈제가 동의할까 생각했다. (...)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고향에 돌아와서, 블로그를 쓰고 있어서, 라고스를 다시 발견해서. 그녀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존재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2권) - P404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 (2권)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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