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요 마을의 유지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고 환경이 열악한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해주며 직원과 그들의 가족까지 피붙이처럼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 또한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신문사를 지원하며 민주 투사의 면모까지 갖춘,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보살핀 사람, 아버지  유진. 
 
75.
우리 집에 온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충분히 만족할만큼 먹고 마시지 않은 채로 떠나지 않게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칭호는 '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 오멜로라가 아니던가.
 

 
하지만 가정에서는 권위적이며 절대신과 같은 존재이다. 맹목적인 신앙심은 신의 이름으로 가족의 절대 복종과 억압, 폭력을 정당화한다.  
 
하고 싶은 말을 삼켜야하고 크게 말하는 방법도, 웃어 본적도 없는 가족. 가장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가해진 폭력으로 유산을 해도, 손가락이 비틀어져도, 가죽 벨트에 의해 몸에 줄이 그어져도, 두 발에 뜨거운 물이 부어져도, 갈비뼈가 부러져도, 그 모든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신이었으니까. 아버지는 그 수없는 폭력 끝에 늘 그들을 부둥켜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뜻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51.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다. 오빠 자자는 조금씩 아버지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캄빌리는 오빠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버지는 늘 옳은데.  
 
두 남매에게 집을 떠날 기회가 찾아온다. 아옥페에 참배를 하기 위해 고모 이페오마가 사는 은수카에 가게 된다. 그것은 아이들을 할아버지와 만나게 하기 위한 고모의 방편이다. 할아버지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비난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교도인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15분 이내여야만 한다. 한 집에 머무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캄빌리는 은수카에 도착한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아마카와 자신의 의사표현을 다하는 오비오라가 신기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아마카가 불편하다. 
 
아마디 신부와의 만남. 캄빌리는 그를 통해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자신이 아닌 새로운 캄빌리를 발견한다. 1등을 해야만 하는 캄빌리, 가능한 말을 삼키는 캄빌리, 아버지가 가하는 육체적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캄빌리가 아닌 그녀 자신. 
 
이페오마 가족과 지내면서 캄빌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씩 내는 방법을 알아간다. 그리고 자자는 삶의 방식이 하나만이 아님을 더 크게 깨닫고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211.
"소리 지를 필요 없어, 아마카."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난 오라 잎을 다듬을 줄 모르지만 네가 가르쳐주면 되잖아." 그런 차분한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다. (...) 킥킥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내 귀를 의심했지만 아마카를 보니 역시나 그 애가 웃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구나, 캄빌리." 아마카가 말했다.
 

 
캄빌리는 여전히 아버지가 두렵지만 그리운, 양가적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지러운 시국과 그와 연관한 아버지 유진의 여러 사정으로 남매는 다시 은수카에 머문다. 하지만 정부와 학교측으로부터 불온자로 낙인찍힌 고모는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아마디 신부는 독일로 부임을 통보 받는다. 그리고 남매의 인생에 절대적 존재였던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와 자자의 선택. 이제 캄빌리는, 가족은 혼자 서야만 한다. 
 
306.
"저기 봐,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피려고 해." 차에서 내리며 오빠가 말했다. 

 
작가가 페미니스트라고, 소설이 가부장제도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십대 소녀의 성장기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장의 폭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 가족의 비극적인 투쟁 이야기다. 신처럼 군림하면서 자애와 강요를 양날의 칼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두 남매는 속절없이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페오마가 아니였다면,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운명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당연다는 듯 여기며 살아갔을까? 그리고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 무거운 족쇄는 벗어던질 수 있었을까?  
 
소설의 마지막, 새로운 비를 기다리는 캄빌리는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다. 캄빌리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자 또한 자신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스스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로는 함의를 품은 보라색 희비스커스처럼. 
 
 
 
나는 소리 내어 웃고 있다. 내가 팔을 뻗어 어머니 어깨에 두르자 어머니도 내게 몸을 기대며 미소 짓는다. 머리 위에 염색한 목화솜 같은 구름이 낮게 떠 있다. 이제 곧 새로운 비가 내릴 것이다. (소설 마지막)

 

 

 

 

우리 집이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한 것은 오빠 자자가 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집어 던진 무거운 미사 경본이 식당을 가로질러 날아가 장식장 도자기 인형을 박살 냈을 때부터였다.

그날 밤 내가 웃고 있는 꿈을 꿨다. 내 웃음소리가 원래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내 웃음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페오마 고모처럼 깔깔대는, 칼칼하고 열정적인 웃음소리였다. - P115

나는 한 번도 대학에 대해, 어느 학교에 가고 무엇을 전공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65

가끔 아마카와 파파은누쿠가 대화할 때면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가 서로 휘감겼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 P205

미소가 입술과 뺨을 끌어당기면서 내 얼굴에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재밌어하는 미소. 그는 내가 오늘 처음으로 립스틱을 바르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또 웃었다. - P219

엄마가 자식한테 어떤 식으로 말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통해 그 애들이 뛰어넘아야할 목표를 점점 더 높였다. 아이들이 막대를 반드시 넘으리라 믿으면서 항상 그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오빠와 내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 P274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캄빌리." - P2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