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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가난한 시골 마을 핸래티에서 자란 로즈가 가족간의 애증, 사랑, 결혼, 독립 등의 굴곡을 겪으며 가난과 그 시대 여성이 갖는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인생 여정을 열 개의 단편연작으로 엮은 소설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자식에게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 딸의 허영과 꿈을 받이들이지 못하는 어머니, 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보다 더 높은 권위에 자리하는 남동생,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 더 나은 세상에 진입하고 싶은 딸.
소설 속 로즈의 모습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여성이다. 어린 시절에는 (의붓)어머니를 바짝 약올려 매를 맞기도 하고, 외모와 성에 대한 호기심, 멋지게 보이는 동성 친구를 우상처럼 흠모하기도 하는 사춘기 시절을 지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겠다고 마음 먹지만 앞날의 두려움과 경제적 여유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연애를 거쳐 결혼을 하는.
로즈의 평탄한 삶이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친구 조슬린의 남편인 클리퍼드에게 빠진, 그때부터 였을까, 아니면 애초에 패트릭에 대한 순수하지 못했던 마음을 안고 결혼한 그때부터 그녀의 이혼은 예정된 일이였을까.
딸인 애나를 전남편에게 보내면서까지 로즈가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단지 클리퍼드와의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혼을 기점으로 로즈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고자 했던 건 아닐까? 그건 [거지 소녀]에서 언급했던,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환상. 누구나 쫓지만 누구도 가졌노라고 장담할 수 없는 그것.
로즈를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 여겼던 클리퍼드, 그녀가 내연녀일 뿐이었던 톰, 로즈를 진심으로 사랑했을지도 모를 사이먼, 하지만 사이먼의 마음은 로즈도 독자도 알 수가 없다. 로즈는 이 남자들을 정말 사랑했을까?
이 소설에서 플로와 로즈의 관계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플로와 로즈.
두 사람은 의붓 모녀지간이다. 하지만 두 여자의 갈등에 있어서 그러한 관계가 주는 영향은 없어 보인다. 그저 시대적으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이 제한적이고, 그 시대에 이상적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역할을 잘 수행함에 있어서 스스로 자긍심을 가졌던 여성들(플로와 같은)이 있었던 만큼 로즈에 대한 플로의 행동은 그녀가 친어머니였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싶다.
플로가 늙어 누군가를 보살펴야할 때, 그녀 곁에 있는 이는 친아들 브라이언이 아닌 로즈다. 두 여자의 오랜 세월 쌓아 진 애증은 여느 모녀와 다를 바 없다. 이혼하고 사랑에 버림 받고, 벌이가 그저 그래도 로즈가 돌아 온 집에는 플로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이는 한 시대를 약자로서 함께 겪어 온 동지애로써의 이해와 공감이 아니였을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스케일이 크다거나 극적인 사건이 없음에도 자꾸 읽게되는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에서 내 삶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지난 날의 향수를 넘어 현재의 나 자신과 내 주변인들을 돌아보게끔 한다.
나는 그녀의 글에서 담담하지만 보통 사람이 갖는 힘을 느낀다.
[장엄한 매질]
37.
끝장을 봐야하는 이유는 결국 부분 적으로는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인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고, 가장 무시무시한 허튼짓도 정당화 될 수 있고 그 행위에 어울리는 감정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관객에게ㅡ교훈을 깨닫더라도 깨달음을 표시할 수도 없을 상대에게ㅡ증명하기 위해서일까?
[특권]
73.
로즈는 그런 상실과 변화에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 그녀가 배운 바에 의하면 인생이란 대체로 놀라운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 이야기를 자꾸만 들추며 코라를 점점 더 나쁘게 묘사하는 플로를 보면 그녀가 너무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토록 긴 시간이 흘렀는데, 그리고 이제 아무 소용도 없는데, 로즈는 플로가 자꾸 경고하고 자신을 바꾸려 한다고 여겼다.
[자몽 반 개]
89-90.
아버지에게 플로는 바람직한 여자의 전형이었다. 로즈는 그것을 알았고 실제로도 아버지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활달하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무엇을 만들거나 비축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빠릿빠릿해야 하고 흥정과 관리에 능해야 하며 사람들의 가식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지적인 면에서는 어수룩하고 아이같아야 하며, 지도나 긴 단어나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을 우습게 보고, 아기자기하면서 알쏭달쏭한 생각, 미신, 전통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로즈가 망신거리인 것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 그러나 뭔가가 잘못되어 바람직한 종류의 여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거지 소녀]
131.
헨쇼 박사는 가난을 그저 불우함이나 결핍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가난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흉한 막대기 모양 전등을 사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도 때도 없이 돈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새로 산 물건을 놓고 악담을 하며 그것을 공짜로 얻은 건지 아닌지 입씨름하는 것을 의미했다. 플로가 정면 창문에 사서 단 비닐 커튼이나 가짜 레이스 따위를 두고 자부심과 질투가 난무하는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문 뒤에 박은 못에 옷을 걸고 욕실에서 나는 소리를 죄다 들을 수 있는 것, 또한 경건하고 발랄하고 조금은 외설적인 경고를 담은 수많은 액자로 벽을 장식하는 것을 의미했다.
[섭리]
256.
직접 가서 보지 않더라도 아이의 금발과 흰 살결, 윤기 흐르는 눈썹과, 자세히 봐야 보이는 투명하리만치 미세한 털이 일어나 불빛을 반사하는 옆모습을 놀랍고도 두려운 기쁨을 느끼며 그려볼 수 있었다. 평생 처음으로 그녀는 가정적인 삶을 이해했고 안식처의 의미를 알았으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271.
상살과 행운의 연속. 그녀가 과거나 미래에, 사랑에, 혹은 그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때,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사이먼의 행운]
301.
그 무엇이 밤새 어두운 부엌에 앉아 연인을 기다리는 로즈 나이의 여자보다 더 절박할 수 있을까? 로즈는 이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냈고 모든 것을 혼자서 했다. 그녀는 도대체 배우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사이먼을 고리로 바꿔 거기에 온 희망을 걸어놓은 그녀는 이제 그를 결코 그 사람 자신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305.
패트릭 이후로 단 한번도 그녀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적이, 그런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다 써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모두.
311.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재앙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줄거리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는 초점의 이동으로부터, 새로운 판단과 해법을 요구하면서 온당치 않고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는 어긋남으로부터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스펠링]
324.
남매는 싸웠고 누이는 눈물을 머금고 그 집을 나왔다. 그런데 로즈는 느꼈다. 그 모든 것의 한꺼풀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주, 아주, 오랜 경쟁ㅡ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누가 더 좋은 직업을 선택했는가?ㅡ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엇을 갈구한 것일까? 그것은 상대방의 인정, 아마도 둘 다 기꺼이 줄 의향은 있지만 아직은 아닌 인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