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된다 - 어느 유대인 소녀의 홀로코스트 기억
루트 클뤼거 지음, 최성만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저자는 193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이다. 이 책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방되기

전 나치의 지배하에 있었던 때부터 게토와 수용소를 거쳐

죽음의 행군 도중 탈출한 후 미국에 정착한 이후의 삶까지를

회고한 자전 문학이다.

홀로코스트 추모 문화에 거부감을 가졌다는 저자는 1988

자전거와 충돌해 머리를 그게 다친 사고가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쓴다. 저자는 글에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 홀로코스트를 대면할 때 제3자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지나온 역사의 반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상황을 겪지 않은 이들과 사이에

다리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자신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리가 존재한다고 인정한 것처럼.

 

p180

여러분은 나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적어도 자극을 받기를 바란다. 성벽 안에 진을 치고 앉아

있지 말고. 이것이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러분이

자와 컴퍼스로 미리 깔끔하게 그어놓은 어떤 틀 안에서만

여러분과 상관이 있다고. 이미 시체더미 사진들을 견뎌

냈고 공동의 책임과 동정심에 관한 여러분의 책무를 다했

노라고 덮어놓고 말하지 말라. 난 여러분이 논쟁적인 태도

로 대결에 나서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나치의 살해를 넘은 넓은 범위를 얘기한다.

이데올로기와 폭력, 나치의 억압은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제와 본질을 같이한다.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기

까지의 본질에 대해 논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p106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의 비호를 받는다는 오래된 관념

또는 편견을 마음 깊이 각인하고 내면화해 가장 명백한

사실을 간과한다.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건 노

약자들과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이라는 것 말이다.

나치가 여자들까지 심하게 다루지 않으리라는 말은 인종

주의 이데올로기와 모순되었다. 말도 안되는 가부장적

단견으로 기사도 정신 따위를 믿었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저자가 유년시절부터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곁에서 서로에게 보호자가 되고 힘이 되었던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사고는 현재에도

많은 부분 잔존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성별, 민족 간의 화해와 조화를 이뤄내기를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280

개개의 성원들이 입신할 기회를 미처 얻기도 전에, 마치

특정 외국인들은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듯 특정 인종을 폄하

하는 것이 거슬렸다. (...) 여기서 '자유로운 나라'란 어떤

이상주의적인 것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누가 무슨 일을

하거나 어떤 처지에 있어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이다 

 

1부에서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열 살 전 빈에서의 시절

을 회고한다. 여기에서 내가 인상적이였던 건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p43

아버지는 드랑시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수용소로 압송되

었고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간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이 생각을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는 압송 중에

자살할 수 있었을테니 분명히 자살했을 거라고, 의사니까

알약을 갖고 다녔을 거라고 믿었다. 이 이야기가 내 희망

사항 더미에서 자랐다는 것을 깨닫는데 반평생이 걸렸다.


저자는 왜 아버지의 죽음이 차라리 자살이기를 바랬을까?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한 것 같아서 였을까,

아니면 자살하지 않았다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수용소

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라는, 무의식 중에라도 자기

세뇌를 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유년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어머니. 빈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두 모녀에게는 서로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딸에게 모진 말을 일삼았고, 딸은 어머니를 대결의 상대로

여겼다. 저자는 이러한 모녀간 신경증이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신도 다정한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니...

 

p72

나는 다정다감한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 아마도 내 어머니의

추근거리는 다정함, 예상치 못한 부당한 벌이며 꾸중과 번갈

아가며 내린 어머니의 다정함이 역겨웠기 때문일 것이다.

 

p91

아우슈비츠는 무슨 교육기관도 아니고 인간성과 관용을

기르는 곳은 더더구나 아니에요. 강제수용소에서는 어떤

좋은 곳도 나오지 않았는데 당신은 하필이면 윤리적인

정화를 기대했단 말인가요? 강제수용소는 하나같이 비루

하기 짝이 없고 쓸모없는 기구들이었어요. 강제수용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어

야해요.

p92

살아남은 건 실로 우연이었다.

 

p100

바로 순례온 유대인, 특히 미국 유대인 덕분에 폴란드에

유입되는 외화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의 중요한 외화벌이 수단이라는 생각.

 

2부에서는 게토와 수용소의 생활, 그리고 죽음의 행군

당시 탈출한 이후에 대해 쓰여 있다. 현재 수용소 문학에

있어서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있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

에서 쓰여 지고, 여성 수용소에 대해서 서술한 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에서 십대 소녀는 유년시절 가부장적 제도에서 여자

이기 때문에 거부당했던 경험들이 수용소 생활에서는

인간으로서 거부당하는 경험까지 더해진다.

이는 어린 소녀가 자신이 거부당하는 이유가 자신한테

있으며 ,세상에서 존재하지 말아야할 대상으로 생각 하

게끔 한다. 그런 와중에도 소녀가 발견한 아이러니.

군인과 수용자들은 국가가 정해놓은 옷을 입는다.

군인은 자랑삼아 문신을 하고 수용자들은 수인번호를

새긴다.

 

p146

명예도 치욕과 같은 수법을 동원하니 말이다.

 

p106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의 비호를 받는다는 오래된 관념

또는 편견을 마음 깊이 각인하고 내면화해 가장 명백한

사실을 간과한다.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건 노

약자들과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이라는 것 말이다.

나치가 여자들까지 심하게 다루지 않으리라는 말은 인종

주의 이데올로기와 모순되었다. 말도 안되는 가부장적

단견으로 기사도 정신 따위를 믿었단 말인가?

 

p115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제일 속상했던 것도

수용소마다 가장 잔인한 이기심이 작동했으리라는 추측,

그래서 수용소에 있다 나온 자는 도덕적으로 무너진

자일 거라는 추측이었다. 내 눈에는 전부 오해고 편견이었다.

 

p120

어머니는 단 한순간도 남편과 아들 두 사람이 대량학살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희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증발해버리는 한정된 양의 액체와 같았다.

 

p133

희망은 기실 불안의 이면이니 삶을 지탱해 주는 건 불안

일지도 모른다.

 

p162

아무런 운율도 사유도 없이 체험만 하는 자는 내 어머니의

품에 주저앉은 그 나이든 여자처럼 이성을 잃을 위험에

놓이고 만다. (...) 공감하고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사건 자체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다.

 

p183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아우슈비츠는 낯선 행성이 아니라

저기 우리 앞에 보이는 쭉 계속되었던 삶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 내가 겪은 것은 저기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혀 닿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뭔가 헤아릴

수 없는 것, 무한성이나 영원성과 유사한 것이라는 이

동시성의 비밀을 발견했다.

 

p240

정당하지는 않지만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폭력성을

감안하면 어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강간은 남성의

소유권에 대한 침탈로 여겨진다. (...) 전쟁은 남자들에게

속한다. 심지어 전쟁의 희생자들을 두고 이야기할 때도

전쟁은 남자들의 것이다.

 

p251

여러분은 내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은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러분은 나를 두고 이야기

하는 듯하지만 실은 여러분 자신의 감정만 이야기한다고.

    

p298

사람들이 강제수용소 수인들이 받은 번호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이 맥락에 속한다. 능욕의 상징인 지워버리라고들

한다. 나는 생존증력의 상징이라고 응수한다. (...) 디타도

그 번호로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려 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번호를 보면 왜 공격적으로 변하

는지를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비교적 많이 다루어진 부분은 저자와 어머니의

관계였다. 어머니의 신경증과 강박증, 남편과 아들을 잃은

상실감, 거기에 자신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인 딸에

대한 소유욕까지.

처음 수용소에 도착해 딸에게 전기담장 근처로 가자며

동반 자살을 하려했던 어머니. 이후 저자의 어머니는

딸을 위해 희생하고 용기를 끌어 모은다. 하지만 저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는 본인의 소유물로 생각

하기 때문이니까. 이는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내내 지속되었다.

나는 저자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어머니에게

벗어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겠구나라고 생각될

만큼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자는 어머니를 때론 이해하고, 다시 부딪힘을 반복

하면서 대립의 관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책소개를 읽었을 때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의 에리카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제어하며

심지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물론 클뤼거의 어머니가 에리카의 어머니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어머니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이 자신에게서도 종종 발견되는 것도

흡사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낱낱이 파해친 보고서나

기록이 아니다. 종교, 인종과 성차별, 비뚤어진 이념,

거기에 과한 민족주의 사상이 개인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 홀로코스트를

문화관광 쯤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고, 지난 역사에

인정과 반성, 그 벽 너머의 본질적 문제를 짚어

나가기를 촉구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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