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에 사두고 안읽다가 이제서야 읽었는데...
뭐야 너무 좋잖아... 나머지 한강작가님 책들 다 구매해야 겠다.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 관리실 옆 화단의 모란은 잘린 혀 같은 꽃이파리들을 뚝뚝 밸어대고, 노인정 어귀의 보도블록에는 분드러진 흰 라일락꽃들이 행인들의 구두 밑창에 엉기던 봄날이었다. (내 여자의 열매) - P9

어머니,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이 거리를 늙고 망가진 얼굴로 떠돌게 될 줄을 그때는 몰랐어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고향 아닌 곳에서도 불행했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내 여자의 열매) - P34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녁에 아이는, 여관방 창 너머로 아스라이 사위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싶어진다. 흙펄을 핧는 파도의 거품이 흰빛인지 황금빛인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 P43

다음날 아이가 잠에서 깨있을 때 엄마는 없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엄마가 떠났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었고, 그렇다고 아주 떠난 게 아니라 곧 돌아올 것이라고도 희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저 생겨난 일대로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견디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 P91

바닷바람이 아이의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퍼려 애쓰며 아이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무허가 주택들의 들쭉날쭉한 담벼락들이 흐린 시야 속에서 겹처진다. 해질녁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 P99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아기 부처) - P119

나는 그의 흉터와 용기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바로 그 흉터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 때문에,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줄 만큼 나를 신뢰해준 데 대한 고마움 떼문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기 부처) - P127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갖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아기 부처) - P134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 (아기 부처) - P135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시간 낭비잖아요" - P137

나는 얼마나 어리석였나. 그 어리석음으로 서로를 망쳐면서도 그것을 몰랐나. 그것을 인내라고, 혹은 연민이라고 부르며 믿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한 인내였나. (아기 부처) - P159

어느 날 그는 빗방울이 전선에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그러니 정말 흥미 있는 이야기는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되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그가 전선의 빗방울을 보기 전까지이다. (어느 날 그는) - P177

사랑이 뭔데?
그가 할 말을 잃고 있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랑이라는 게 만약 존재하는 거라면, 그 순간순간의 진실일 거야. 순간의 진실에 대해서 물은 거라면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영원을 믿어? 있지도 않은 영원이라는 걸 당신 힘으로 버텨내려고? 버터내볼 생각이야?
(어느 날 그는) - P208

사람도 그렇잖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좋아지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만이 가장 크고 중요한 진실이지만... 상황이 바뀌거나, 시간이 지나거나 하면 모든 것이 함께 바뀌어 버리잖아. (어느 날 그는) - P210

결국 영원한 건 없는 거야, 그렇지?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살기가 훨씬 쉬위질지도 몰라. (어느 날 그는) - P210

집착하지 않는 성벽이었으므로, 사랑이란 대체로 집착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므로, 그녀의 사랑은 쉽게 식었다. 민화는 자신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굳이 그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숨길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 P211

그랬다. 그는 민화의 애정이 식어가는 과정을 보았다.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과정을 똑똑히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저지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이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얼마나 큰 잘못에 대한 벌로 그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어느 날 그는) - P231

그는 눈을 감았다. 델 것 같은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입술과 턱을 적신 그 눈물은 억센 힘줄이 드러난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러닝셔츠로 번졌다. 바로 그 순간으로 인하여 그의 삶이 바뀌었으나, 그는 아직까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 채 무수한 그림자들의 춤추는 곡선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어느 날 그는) - P239

그때 그는 자신이 언젠가 일 년에 하루뿐인 초파일을 아쉬워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일 년에 하루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큼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붉은 꽃 속에서) - P260

옛날에, 중국의 한 스님이 멀리 있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지.
저쪽 방에 가서 주무시지요.
객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이 객스님 하는 말이, 밖이 어둡습니다, 스님. 한데 이, 방에 있던 스님이 촛불을 켜서 건네주었다가, 객스님이 받자마자 후욱, 불어 꺼버렸어. 바로 그때, 초를 들고 섰던 객스님의 눈에서, 깨달음의 눈물이 흘러내린 거라. (붉은 꽃 속에서) - P261

나무들이 바라보는 쪽은 언제나 햇빛이 드는 쪽이다. 운동장의 저 나무는 밝은 곳에서 자란 덕분에 둥글고 의젓한 모양새로 가지를 뻗었지만, 그늘에 선 나무들의 가지는 예외 없이 간절하게 휘어 있다. 어떤 나무는 빛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나무는 그늘에서 태어나나,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잎사귀는 똑같이 푸르다. 그들의 잎사귀는 햇빛을 향해 고스란히 펼쳐진다.
(붉은 꽃 속에서) - P266

밤새 그의 설익은 꿈은 작은 소리에 놀라 조각나곤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의 등을 누군가 떠밀었다. (붉은 꽃 속에서) - P269

신기한 것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 기억들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났을 때 그것을 잠자코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래서 그 감각과 생김새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면 어느 사이 그것이 사라져 있곤 한다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난 밝고 빈 마음속에서 그는 잠시 쉬었다. 다시 기억이나 감정이 솟으면 그것을 들여다보았고, 사라지고 나면 다시 쉬었다. 선방에서 나와 잠시 경내를 걸을 때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폭우에 씻긴 듯 또렷해져 있곤 했다. (붉은 꽃 속에서) - P284

용담이 그 지등의 불을 불어 껐을 때, 서울 큰스님의 법문과 달리 덕산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기뻐하며 큰절을 했다. 그 불꽃이 꺼진 순간 그의 마음에 어떤 불이 켜졌을까. 어두우나 밝으나 오롯이 거기 있었던, 늘 거기 있었던 마음 한자리를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서) - P287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서) - P287

서른 살이 되던 겨울, 어느 저녁 그여자는 세면대에서 발을 씻다 말고 갑자기 손을 멈춘다. 상처는 진작 아물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가시덩굴이 날카롭게 그녀의 발을 찔러올 때 입술을 악물었던 그날의 햇빛, 눈이 아리도록 바다와 논배미와 비포장도로의 모래 먼지 위로 차올랐던 햇빛이 그녀의 차가운 발등 깊숙이 박힌다. (아홉 개의 이야기) - P294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뒷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 소리를 낸 순간.
(아홉 개의 이야기) - P300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님아 있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남자는 들었다.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고통을 느길 수도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승의 소리들은 귓전에 머물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태중에서 소리부터 들게 되는 것과 같이.
(아홉 개의 이야기) - P303

아주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만져지고 안 들리면, 꿈속같이 고요해지면, 그 캄캄한 곳에서, 그때 무서워하거나 쓸쓸해하지 말아.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아홉 개의 이야기) - P308

새의 시체가 썩어갈 때까지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녔어. 새의 온기가 사라지고 나자 이번에는 내 손의 온기가 그 싸늘한 새에게 옮겨졌고, 마침내 내 손이 새인지 새가 내 손인지 알수 없어졌지. 더 이상 가지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시체가 부패했을 때에야 그것을 철길 끝의 흙 둔덕에 묻었어. (철길을 흐르는 강) - P355

만일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내 몸을 태워보아줘. 사리가 나올지도 몰라. 늑골과 늑골 사이에, 명치가 있던 자리를 잘 찾아봐. 거기 얹혀 있던 외로움이 뭉처서 독한 돌이 되어 있을 거야. 당신이 그랬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한번 외로운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사람이라고.
(철길을 흐르는 강) - P359

다만 꼭 한 장면만은 넣고 싶어. 그곳이 무슨 강이라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 아버지가 직접 만든 새 구두였지. (철길을 흐르는 강) - P370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새로 만들어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체세포가 모두 바뀌는 데 칠 년의 주기가 걸린다고 들었다. 칠 년 동안, 내 세포들이 새것이 되었다. 내 눈과 귀와 코와 입술, 내장과 살갖과 근육 들이 소리 없이 몸을 바꾸었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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