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가 된다. 아주 좋다. 망망대해에 남겨진 기분.

눈이 내렸다. 저물녘, 구름 사이로 자갈투성이인 강가에 연한 빛을 비추던 하늘이 어두워지자 사위가 돌연 고요해졌다. 두 송이, 세 송이 눈발이 흩날렸다. 눈은 나무를 베고 있는 사무라이와 하인들의 일옷을 스치고, 덧없는 목숨을 호소하듯 그들의 얼굴이나 손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들이 묵묵히 손도끼만 움직이고 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무시하듯 이리저리 주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녁 안개가 눈과 섞여 퍼지자 시야는 온통 잿빛이 되었다. - P7
"전쟁이 있으면 말이야, 전쟁만 있다면 공을 세워 땅도 늘릴 텐데." - P14
그는 또 요조와 함께 산기슭에 있는 작은 연못으로 낚시를 하러 가기도 한다. 늦가을, 갈대가 무성한 그 어두운 연못에서 갈색 물새에 섞여 목이 긴 백조 서너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을 볼때가 있다. 백조들은 추위가 심한 먼 나라에서 바다를 건너 찾아온 것이다. 봄이 되면 철새는 다시 크게 날갯짓을 하며 골짜기의 하늘을 날아 떠나간다. 그 새를 바라볼 때마다 사무라이는 자신은 평생 가볼 수 없는 곳을 그들은 알고 있겠구나, 하고 문득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부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 P17
몸을 구부리고 대기실에 있는 가신들에게 인사하며 그는 일본인들이 결국 자력으로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로 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했다.
‘개미 같은 인종이다. 그들은 뭐든지 하려고 든다.
선교사는 이 순간 왠지 웅덩이를 만나면 그 일부가 자기 몸을 희생하여 다리가 됨으로써 동료를 건너게 하는 개미를 떠올렸다. 일본인은 그런 지혜를 가진 검은 개미떼다. - P36
하느님은 누구든 쓰시지만 일본인은 철저하게 도움이 되는 자만 쓴다. 일본인은 선교사가 이 계획에 유용하다고 생각했기에 일단 위협해두고 다시 살려주었을 것이다. 이것도 일본인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 P37
"에도에서의 포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바울회가 일본인 신도와 계속 접촉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쇼군의 쓸데없는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머지않아 현재 선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있는 지역에까지 박해를 초래할 거라고 베드로회의 수도사들은 호소하고 있네." - P38
‘그들에게는 이익을 주고 우리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다.‘ - P41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고 오는 것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인을 체념하게 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44
그리고 선교사는 자신을 일본의 주교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의 야심을 부끄러워했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타일렀다. 나는 사욕으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기리시탄을 금하려는 이 나라에서 최후의 강력한 방어선을 치기 위해 주교의 지위가 필요한 것이라고 오직 나만이 이렇게 교활한 일본인들과 싸울 수 있다고. - P57
영주님이 오가쓰의 후미에서 큰 배를 건조하고 있는 건 알지? 그 배는 기슈로 밀려온 남만인들을 태우고 멕시코라는 먼 나라로 갈 거네. 어제 성 안에서 시라이시 님이 문득 자네 이름을 입에 담으시면서 영주님의 사절들 가운데 한명으로 멕시코까지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네." - P60
"꿈같겠지만"
"꿈같은 일은 아니네" - P62
‘아버지나 숙부에 순종했다는 것뿐이다. 무슨 일에든 거스르지 않고 농민들처럼 인내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재능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이시다 님은 인내심 강한 그 성격을 높이 사주었는지도 모른다.‘ - P65
신학생 때부터 그는 잘 때 자신의 손목을 묶고 눕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건강한 몸을 덮쳐오는 강렬한 성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평생 포기한다고 생각한 성욕이 젊었을 때만큼 그를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언제 날뛸지 모르는 말을 묶듯이 선교사는 혼자 밤 기도를 마치고 바닥에 막대기처럼 눕기 전에 손목을 끈으로 묶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 P71
사무라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숙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숙부의 염두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잃어버린 땅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 땅을 다시 손에 쥐는 것만이 숙부의 사는 보람인 것이다. 하지만 사무라이 자신은 조금 전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와 새로운 장소를 얻어 그곳으로 옮겨갈 마음이 별로 없었다. 이 골짜기에서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죽고 싶었다. - P79
화창하다. 골짜기는 이미 봄이다. 잡목림에는 하얀 꽃이 피고 밭에서는 종다리가 울고 있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볼수 없는 이 광경을 잊지 않으려고 사무라이는 말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P92
5월 5일 오지카의 작은 항인 쓰키노우라를 출항했다. 일본인들이 ‘무쓰마루‘라 칭하고 스페인 선원들이 ‘산 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호라 부르는 이 갤리언선은 차가운 태평양을, 북동쪽을 향해 흔들리며 나아가고 있다. - P99
앞으로 내게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사절들의 이름을 적어두자. 니시 규스케, 다나카다로자에몬, 마쓰키 주사쿠, 하세쿠라 로쿠에몬, 이 네 명이다. - P101
나는 두 달이나 이어질 이 배 여행을 신부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것이 염려되었다. 스페인인 선원들을 위해 식당에서 매일 미사를 드리는데 일본인들은 한 명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행복의 의미란 현세의 이익을 얻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일본인은 현세의 모든 이익을ㅡ부를 얻는 것,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병이 낫는 것ㅡ목적으로 한 종교라면 달려들지만, 초자연적인 것과 영원에 대해서는 전혀 무감각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 P107
사무라이는 현기증이 났다. 이마를 때리는 바람에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동쪽도 파도가 미쳐 날뛰는 바다. 서쪽도 파도가 싸우는 바다. 남쪽도 북쪽도 보이는 거라고는 바다뿐, 난생처음 사무라이는 바다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알았다. 그 바다를 앞에 두고 있으니 그가 살던 골짜기는 한 알의 겨자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P109
종교에서 현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본인. 그들을 볼때마다 나는 그 나라에는 그리스도교처럼 영원이라든가 영혼의 구제를 찾는 진정한 종교는 생겨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신심과 우리 그리스도교도가 신앙이라 부르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거리가 있다. - P122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한테 펠라스코 님은 만만찮은 책사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책사가 만 리의 파도를 넘어 일본에까지 와서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벨라스코 님은 정말 하느님이 있다고 믿습니까? 왜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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