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명작의 향기가 느껴진다.


1635년 루비노 신부를 중심으로 네 명의 사제들이 로마에 모였다. 이 사람들은 페레이라의 배교라는 교회의 불명예를 설욕하기 위해, 박해를 가하는 일본으로 들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잠복 선교를 행할 계획을 세운 사제들이다. - P12

일본으로 향하는 모국의 배편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 세 명의 사제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마카오까지 겨우 도착했다. 마카오는 극동지역의 포르투갈 근거지인 동시에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기지였다. 혹시나 하는 요행을 기대하면서 여기까지 온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곧 이곳에 있는 순찰사 발리냐노 신부에게 혹독한 주의를 들어야만 했다. 일본에서의 선교는 이미 절망적이며 더이상 위험한 방법으로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마카오 선교회에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신부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 P17

"그러나 우리의 밀항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는 지금 사제를 잃고 길을 잃은 신도들이 한 무리의 어린 양들처럼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그 신앙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서라도 누군가가 가야만 합니다." - P22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것들을 참아야 했던가. 이 낯설고 황폐한 동양의 땅까지 우리는 어떻게 도착했던가. - P31

그들은 기쁨은 물론 슬픔조차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랜 비밀 생활이 이 신도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슬픈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고난을 신도들에게 주시는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 P53

인간이란 묘한 것이어서, 타인은 어쨌든 간에 자기만은 어떤 위험에서도 모면될 수 있다고 마음 어딘가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 오는 날 먼 곳을 바라보며 그곳에만은 희미한 태양이 비치고 있을 언덕을 상상할 때처럼. - P56

형과 누이가 화형에 처해지던 날, 형장을 둘러싼 군중 틈에서 이 겁쟁이의 얼굴을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들개처럼 진흙투성이가 된 그는 형과 누이의 순교를 보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어서 곧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 P64

기쁨도 행복감도 아닌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가슴을 압박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유용한 존재라는 희열의 감정이었습니다. 당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이 지구 끝의 나라에서 저는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 P71

도모기 마을은 완전히 버려진 폐허 같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부락을 에워싸고 있는 무서운 침묵을 느꼈습니다. 저희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이 지상의 행복이나 요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알고 있다 하더라고 저는 한낮의 이 무서운 침묵이 마을에서 빨리빨리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P78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 P85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봉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 P86

관리의 심한 재촉에 결국 모키치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 P92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요? 저는 오랫동안 성인전에 쓰인 그런 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 P93

모키치도 이치소우도 지금 주님 옆에서 그들보다 먼저 간 많은 일본인 순교자들과 똑같이 영원의 지복을 얻고 있을 것이라고,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 P94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 - P96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 P106

"그렇지는 않아. 가령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을 상상하면 알 수 있지. 그는 아직 아내를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아내가 자신을 배반한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 배신행위에 혐오를 느끼는 남편의 기분, 그것이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가진 마음이었을 거야." - P118

"신부님, 용서해 주세요." 기치지로는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먹이며 외쳤습니다. "나는 약해요. 나는 모키치나 이치소우처럼 강한 자는 될 수 없어요." - P123

"선교사들이 그렇게까지 괴로움을 끼쳤습니까?"

"받고 싶지도 않은 물건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을 고마운 폐라고 하오. 그 뜻은 고맙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곤란해지는 것을 말하오. 가톨릭의 가르침은, 이 강제로 밀어 넣은 고마운 폐와 매우 흡사하단 말이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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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2-04-11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흠....읽고 계시군요 ㅎㅎㅎ

새파랑 2022-04-11 16:36   좋아요 2 | URL
제가 han님 리뷰 보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절반 정도 읽었는데 완전 좋더라구요 ^^ 오늘 다 읽어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4-13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바오로딸 버전으로 만났는데
번역이 어떻게 다른지 살짜쿵
궁금해졌습니다.

새파랑 2022-04-13 20:22   좋아요 2 | URL
이 책 번역도 아주 좋고 몰입감있게 잘 읽히더라구요, 너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