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소세키는 좋다.

내가 아무리 걷는다고 해도 소나무 쪽에서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아예 우두커니 서서 소나무하고 눈싸움이나 하고 있는 게 나을 뻔했다. - P15

그 흐릿한 세계가 흐릿한 채 널리 퍼져 정해진 운명이 다할 때까지 앞길을 막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멈춘 한쪽 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면 그 불안 속에 한 발짝 발을 들여놓는 셈이다. 불안에 쫓겨, 불안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움직여서는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걸어도 해결될 리 없다. 평생 해결되지 않는 불안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 P20

이래서는 사는 보람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살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 P21

동시에 뿔뿔이 흩어진 자신의 영혼이 흔들흔들 불규칙하게 활동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자신을 타인처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나온 진상에서 생각하면 인간만큼 믿을 수 없는 존재도 없다. - P42

자신이 거울 앞에 서 있으면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신경 써본들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의 규칙 이라는 거울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면 자신이 거울 앞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 P44

병에 잠복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에도 잠복기가 있다. 이때에는 자신이 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또한 그 사상이나 감정이 외계와의 관계로 의식의 표면에 드러날 기회가 없으면 평생 그 사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이런 거라며 줄기
차게 반대의 언행을 해 보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 언행은 모순되어 있다. 스스로 미심쩍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심쩍다는 것은 모르더라도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한다. - P50

잠이 들면 문득 시간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시간의 경과가 고통이 될 때는 자는 게 최고다. 죽는 것도 아마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죽는 것은 쉬운 일 같아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 P71

어떤 사람이 물에 빠지려는 찰나에 자신이 살아온 일생이 빠짐없이 눈앞에 생생하게 스쳐가더라는 이야기를 그 후에 들었지만, 그때의 내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자면 그건 결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만큼 빠르게 실제 세계에 놓인 내 입장과 처지를 자각한 것이다. - P73

나는 내 주위의 것이 모조리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자각함과 동시에 나는 보통의 인간과 달리 모두가 활동할 때도, 다른 사람들로 인해 내 기분이 변하지 않는 외톨이라고 생각했다. 소맷자락이 스치고 무릎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영혼만은 마치 아무런 인연도 관계도 없는 다른 세상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유령 같은 기분이었다. - P74

혼자 전락하는 것은 둘이서 전락하는 것보다 쓸쓸한 법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면 실례되겠지만 나는 이 사내를 한 구석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저 함께 전락해준다는 점만이 고마워서 아주 유쾌했다. - P92

만약 죽고나서 지옥에라도 가는 일이 생긴다면 사람이 없는 지옥보다는 반드시 요괴가 있는 지옥을 택할 것이다. - P92

여름이 되어도 겨울의 마음을 잊지 않고 덜덜 떨고 있으라는 건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다.

목구멍만 넘어가면 뜨거움을 잊는다는 말처럼 잘도 잊어먹고 괘씸한 말을 꺼내지만,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고 잊어먹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궤변도 뭣도 아니다. 거짓 없는 진짜를 말하는 것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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