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에 이렇게 높이 올라온 거지? 빠르구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하기도 하고 깨닫기도 하는 것과 같은 거겠지." - P20
죽음은 만사의 끝이다. 또 만사의 시작이다. 시간을 쌓아 날을 이루는 것도, 날을 쌓아 달을 이루는 것도, 달을 쌓아 해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모든 것을 쌓아 무덤을 이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덤 이쪽의 모든 다툼은 살 한 겹의 담을 사이에 둔 업보로, 말라비틀어진 해골에 불필요한 인정이라는 기름을 부어 쓸데없는 시체에게 밤새 춤을 추게 하는 골계다. 아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자는 아득한 나라를 그리워하라. - P27
고통의 기념이 필요하다면, 백발이 될 때까지 해아려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터져서 뼛속으로 들어가 사라질 만큼 많다. - P27
마음을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 동안은 죄가 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있는 수수께끼는 법정의 증거로는 좀 약하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 뭔가 있었다는 것을 묵인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안심하고 있다. 천하는 태평하다. 어떤 사람도 뒤에서 손가락질할 수 없다. 손가락질한다면 그 사람이 나쁘다. 천하는 어디까지나 태평하다. - P45
우주는 수수께끼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마음이다. 마음대로 풀고, 마음대로 안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의심하고 들면 부모도 수수께끼다. 형제도 수수께끼다. 아내도 자식도, 그렇게 보는 자신조차 수수께끼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억지로 떠맡고 백발이 되어도 꾸물꾸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밤중에도 번민하기 위해서다. - P61
오노는 왼손을 뻗어 책상에 기댄 채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조금 전에 받은 편지 봉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멀리서 바라보았으나 쉽사리 봉투를 뒤집지 않는다. 뒤집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다. 짐작이 되기에 뒤집기가 힘들다. 뒤집었다가 짐작한 대로라면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 - P81
내 세계와 내 세계가 엇갈렸을 때 할복을 하는 일이 있다. 자멸하는 일이 있다. 내 세계와 다른 세계가 엇갈렸을 때 둘 다 무너지는 일이 있다. 부서져 날아가는 일이 있다. 혹은 길게 열기를 끌며 무한한 것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있다. 생애에 한 번 굉장한 엇갈림이 일어난다면 나는 막을 내리는 무대에 서는 일 없이 스스로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 P122
자신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고, 갈라진 세계가 각각 움직이기 시작하면 괴로운 모순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소설은 그 모순을 자신만만하게 그린다. 사요코의 세계는 신바시 역에 부딪쳤을 때 금이 갔다. 다음은 깨질 뿐이다. 소설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지금부터 소설을 시작하는 사람의 생활만큼 딱한 것도 없다. - P155
사요코는 다가갈 수가 없다. 손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다.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오노는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P159
떠나는 자는 무자비하게 떠나간다. 미련도 배려도 없이 떠나간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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