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이승우 작가의 책인데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떠난다는 것은 붙어 있는데서 자기를 떼어내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자기를 떼어내기를 원했던 것일까? - P11
들을 때는 듣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까 나에게 말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흐른 후 듣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수정되었다. 말하는 사람은 말만 하고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은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 P12
쉽고 단순한 파악을 일삼아온 사람은 쉽고 단순하게 파악되지 않은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불확정의 상태로 내버려져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쉽게 결론 내리고 의심 없이 믿어야 편하기 때문에 쉽게 결론 내리고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럴때 그에 의해 파악된 것은 그의 믿음 외에 무엇일까? 그가 믿고 싶은 것 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을까?
(쉬운것만, 믿고싶은것만 믿는게 진실일까?) - P13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만, 이것은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다.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다) - P21
그러니까 어머니의 기준에 의하면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이해되지 않은 채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둘러 이해하려고 했다. 서둘러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참된 이해를 위해 고려해야 할 많은 것들을 무시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화한다. 예컨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아야 한다. 내면 같은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 P22
선교사라니. 대기업은 아니지만 제법 튼튼하고 규모도 있는 건설회사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어느 날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더니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단 말인가.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니.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선교사라는 그의 신분은 십일 년 전의 돌연한 사라짐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 P27
십일 년 전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에 휘말리기 싫어서 어머니는 배신감을 그러쥐고 버티는 쪽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충격이나 슬픔보다는 그 편이 견디기 쉽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충격이나 슬픔보다는 배신감이 견디기 쉬울지도) - P28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 언어로 된 누가복음을 눈으로 훑어보기만 했다. 읽을 수 없는 낯선 글자들이 아버지의 마음처럼 여겨져서 민망했다. - P33
나는 세상에서 살았고, 그러나 세상은 험악했고, 살기에 적하지 않았고, 내가 세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자주 깨달아졌고,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아주 많이 애를 써야했고, 무리를 해야 했고, 덩달아 험악해져야 했고, 그러나 잘되지 않았고, 그래서 잘살지 못했다. 살면서 자주 내가 참으로 살기를 갈망했던, 살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삶을 그리워했다. 그리워만 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 P34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그렇게 완전하게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나는 그 생각이 순진하기보다 이기적이라고 판단했다. - P36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한 여자가 때때로 느꼈을 슬픔과 모멸감과 그것들을 뭉그러뜨리기 위해 구사해야 했을 인위적인 몸짓에 대해 생각했다.
(저 멀리 있는 곳을 바라보는 함께 있다는건..) - P37
나는 이미 천 년전의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자욱한 먼지들은 공중에 떠오르기 전까지 그 먼지들이 들러붙어 있던 대상에 주목하게 했다. 먼지가 날리지 않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 보이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을 것들. 그러나 보였으므로, 보인 다음에는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인 다음에는 보지 않을 수 없다.) - P50
욕심도 죄고 미혹도 죄고 분별력 없는 것도 죄다, 하고 자조 섞인 어조로 말했다. - P56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믿음이 문제일 때는 믿음을 표면에 내세우기가 어렵다. 능력의 있고 없음은 ‘나의 문제지만, 믿음의 있고 없음은 그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무능은 나를 향하지만, 나의 불신은 그를 향한다. 그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너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쉽다.
(믿음과 불신.) - P71
"정원을 황무지로 바꾸기 위해, 글쎄요, 뭘 해야 할까요?" 나는 무슨 대답이든 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무슨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거야." - P75
"내가 겪은 걸 왜 네놈들이 안 겪었다고 선언해. 내 과거를 왜 내가 아닌 네놈들이, 마치 네놈들의 과거인 것처럼 진짜네, 가짜네, 판단하고 주장하고 그러는 거야. 네놈들이 거기 있었어? " - P91
덮고 지우고 없앨 수는 있지만 덮이고 지워지고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멋진 말이다. 메모해야지.) - P94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그곳에 빠졌다면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빠졌다면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아서 그곳에 빠진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할 무슨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냥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래밭이 쑥 꺼지면서 내 발을 잡아당겼다. 그것이 전부이다. - P107
먼저 앞에서 출발한 놈들은 힘도 안 내고, 힘이 안 드니까 힘을 안내도 되고, 힘을 안 내도 되니까 지치지도 않고 잘도 달리는데, 나는 힘을 내야 하니까 힘이 들고, 힘을 내도 계속 힘이 드니까 지치고, 뒤로 처지고, 그러니까 잘 못 달린다. 악순환이다. 앞에서 먼저, 출발한 놈들이 달리는 코스는 잘 닦인 평탄한 길이라 산책하듯 느긋하게 가는데, 뒤에서 나중에 출발한 내 길은 울퉁불퉁한 자갈밭이라 그럴 수가 없다. - P113
희망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희망이 날아가버리는데, 사람들이 그걸 이해 못해요. 희망이 날아가버리기 전까지만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게 희망인데, 사람들이 그걸 이해 못해요.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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