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한강 작가님의 작품. 지금까지는 너무 좋다.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 P17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에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 P27
그녀의 습관들에 대해 알 만큼 안다. 이렇게 내 이름만 먼저 부르는 것은 안부 인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한 용건이다.
(이건 완전 공감이 된다.) - P30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눈에 대한 감정.) - P44
누군가가 먼저 전화를 걸어, 여기 눈이 오는데 거긴 어떠니, 라고 물으면 여긴 내일 온대, 라고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내년에는 할 수 있을까, 라고 둘 중 누군가가 물으면, 그래, 내년엔 꼭 하자, 라고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었고, 그렇게 끝없이 연기되고 있는바로 그 상태가 그 일의 성격이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 P48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그 웃음에 문득 전염되어 내 마음이 밝아지면, 내 밝아진 얼굴에 안심한 인선의 눈이 더 환해졌다.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아무리 까다로운 인터뷰 상대를 만나도,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가 생겨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침착한 얼굴을 보면 더이상 당황할 필요도, 허둥거릴 이유도 없다고 느껴졌다. - P51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오래전 겨울에 들었던 인선의 가출 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어머니만큼이나 인선이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만 열일곱 살 아이가, 얼마나 자신이 밉고 세상이 싫었으면 저렇게 조그만 사람을 미워했을까? 실톱을 깔고 잔다고, 악몽을 꾸며 이를 갈고 눈물을 흘린다고 음성이 작고 어깨가 공처럼 굽었다고.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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