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8 - 일본 2 : 역사 편 먼나라 이웃나라 8
이원복 지음 / 김영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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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일본에 대한 역사를 적은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일본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섬나라 일본에서 우리나라나 중국대륙으로 건너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우리나라나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을 만든 거였고, 고기에 원주민인 아이누족과 동남아시아 등에서 온 남방민족이 섞여 오늘의 일본민족을 이룬 것이다. 인류가 지상에 나타난 것은 약 4백만 년 전이긴 하지만 원숭이 같은 모습의 원인이었고,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70만 년 전에야 나타난다. 지구 기후가 변화함에 따라 급격히 추워져 세상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빙하기와 다시 따뜻해지는 해빙기가 반복됨에 따라 바닷물의 높이가 낮아지고 높아지기를 반복하였다.  

 약 1만 년 전 지구엔 또다시 빙하기가 찾아와 바다의 수면이 크게 낮아졌다. 그로 인해 물에 잠겨 있던 부분이 뭍으로 변해 중국, 한반도, 일본은 육지로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일본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때 몽고계 아시아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을 구몽고계하고 하고, 그 뒤에도 시베리아, 만주 등 추운 지역에 적응하기 위해 변화한 신몽고계가 건너가 구몽고계, 신몽고계가 서로 섞여 혼혈을 거듭아여 오늘날 인본민족의 부리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수십만 년 전에도 일본이 대륙과 연결된 적이 있었으므로 매며드 가 발견되고 효고현 아카시란 곳에서 구석기시대 인간의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일본에는 이미 구석기시대에 인류가 갈았다고 일본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적인 역사는 빙하기가 끝나 얼음이 녹은 불로 해수면이 높아져 오들날처럼 대륙과 떨어진 섬나라가 되는 1만 년 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아직 농사가 시작되기 전인 신석기시대여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시대였다. 당시에 만든 새끼줄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질그릇이 발견되어 일본의 신석기시대, 본격적인 역사가 열리기 직전의 시대를 '조몬시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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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7 - 일본 1 : 일본인 편 먼나라 이웃나라 7
이원복 지음 / 김영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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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당시 일본 사람들의 사는 생활과 제도 등을 정리하여 쓴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일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썼습니다. 

 일본이과 우리나라는 단른점이 있다. 한국사람들은 불을 때서 방바닥을 따끈따끈 데우는 온돌방 생활을 했는데, 일본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다다미란 것을 바닥에 깔고 살았다. 음식으로 가면 두 나라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사람이 맵고 짜게 먹는 데 비해 일번사람은 싱겁고 달착지근하게 먹는다. 또 한국사람은 뜨거운 음식을 먹어야 '제대로 먹었다'고 하는데, 일본사람은 미지근하게 먹지 펄펄 끓는 음식은 못 먹는다. 식탁 위에서 끓여 먹는 일본음식은 샤브샤브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자극적인 한국음식이 일본에서는 인기이다.  

 음식 먹는 방식도 서로 달르다. 한국인은 찌개 등을 가운데 놓고 여럿이 같이 먹지만, 일본사람은 한 음식을 여럿이 함께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반드시 한 사람앞에서 자기것만 먹는다. 이예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음식상을 따로 차려놓고 먹는다. 

 술 마실 때의 예절, 즉 주도도 달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의 술잔이 비어야만 다시 따라준다. 즉 술잔이 남아있는데 채우는 것은 '첨잔실례'라 하여 예절에 어긋나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술을 한 모금만 마셔도 다시 따라 가득 채워 주는 게 예이로 상댜방 술잔이 비면 큰 실례를 저지른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사람들의 성격은 대개 솔직하고 직선적이어서 술만 한자 걸치면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는 편이고,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친한 친구가 아닌 사람에게도 말이다. 그러난 일본인들은 속에 있는 생각과 말하는 게 전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에 취했건 안 취했건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길 극히 꺼려하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본심을 말하더라도 빙빙 돌려 말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상대의 본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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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꽁이 서당 7 - 조선시대 정조편 맹꽁이 서당 7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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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조선 시대 때의 왕인 정조가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쓴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정조때 있던 이야기를 정리하여 썼습니다. 

 수원 화성은 사젹 제3호로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에 돌로 쌓은 성이다. 성의 전체 둘레는 5520m이다. 1794년 정조가 명을 내려 채제공의 책임 하에 공사에 착수하여 1796년 9월 완공하였다. 우형원과 정약용 등의 과학적 지식과 전통 성의선축법 및 중국 성의 장점을 고루 활용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등록되었다. 

 삼정승은 조선 시대 국정을 통괄하던 의정부의 최고 대신을 말한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세 대신으로 영의정은 대부분의 경우 좌의정을 지낸 원로 대신이 임명되었다. 혹은 삼의정이라고도 부른다. 육판서는 고려, 조선 시대 국가의 정무를 맡아보던 대표적인 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공조의 6개 관청의 수장을 일컫는 말이다. 이 여섯 새 기관은 육부 또는 육관이라고도 부른다. 

 규장각은 정조가 1776년 궁궐 안에 설치하여 역대 왕들이 친필, 서롸, 서책 등을 관리하던 조선 시대의 왕실 도서관이다. 세조 때 일시적으로 설치되었지만 폐지되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정치 혁신의 중심부로 삼고자 설립하였다. 규각장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에 두었다가 1895년 규장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조선, 중국의 각종 책들과 왕가의 문서들을 보관하였다. 1897년. 고종 즉위 34년에 다시 규장각으로 이름을 되돌렸다.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과 참사관실이 설치되어 규장각 도서들을 소장했으며 나중에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게 된다. 광복 뒤에는 서울 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했다. 현재는 규장각 도서 13만권, 고 도서 2만 5000여권, 고문서 5만여 점 등 총 22만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홍봉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 세자의 장인이다. 사위인 사도 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사서 죽자 여전히 정권의 자리를 지켰다. 사심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당쟁을 막고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뽑아 썼다. 나라의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는 등 영조의 정책을 도와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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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꽁이 서당 6 - 조선시대 영조편 맹꽁이 서당 6
윤승운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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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조선시에서 영조때의 사건을 만하로 하여 쓴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일고 조선시대때 영조이야기를 정리하여 썼습니다. 

 노론의 주장으로 왕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영잉군은 이후에도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몇 번씩 위혐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임인옥사 이다. 당시 소론의 대표 인물이었던 김일경은 목호룡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노론과 왕세자가 서로 힘을 모아 경종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하게 된다. 이로 인해 당시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노론 사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분들께서 참형을 당하고, 이와 관련 있는 170여 명이 귀양을 가거나 옥살이를 하였다. 이에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노론이 소론에 의해 쫓겨나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영잉군은 인원왕후에게 호소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수렴청전은 왕이 어린나이로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어린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일을 말한다. 남녀의 구별이 엄격하여 군신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청에 발을 치고 그 뒤에서 접견하였으므로 수령청정이라고 불렸다.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 외척이 등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기도 했다. 세자나 세손이 왕 대신 정사를 보는 경우에는 대리청정이라고 부른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첫 번째 부인이엇던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179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순왕후의 친정은 노론 쪽이었으나, 사도 세자가 소론 쪽에 가까웠기에, 그와 사이가 쫗지 않았다. 때문에 훗날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데 정순왕후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훗날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마저 승하하고, 11세의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스스로 '여자국왕' 이라 칭했을 정도로 임금의 모든 권한과 권리를 대신 행사했으며,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여 정약용 등을 축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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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원정대 - 유네스코가 선정한 자랑스런 우리 문화유산
이룸 글, 류수형 그림 / 재미북스(과학어린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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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들을 적어놓은 책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중 세가지를 정리하여 썼습니다. 

 팔만대장경판의 본 이름은 고려대장경이다. 국보 제32호이  고려대장경은 몽공이 우리나라에 처들어 왔을때 13명의 스님들이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들을 몰아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부처의 말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목판의 개수는81,258장이나 되서 팔만대장경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파만대장경은 목판 인쇄로 만들어졌다. 목판 인쇄란 책의 내용을 목판에 한 자, 한 자 세겨 왼쇄하는 것이다. 팔만대장경판이 다 만들어지기까지는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때는 고종 38년인 1251년 이였다. 즉 7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조선 시대 때 지어진 궁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양의 중심 궁궐은 경복궁이었고 창덕궁은 임금이 가끔 찾아와 머무는 궁궐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터 버린 창벅궁을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하여 중심 궁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 환경과 아름다게 조화를 이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성의 첫 번째 왕인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책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오핸 시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이다. 총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일반 백성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 국가와의 관계까지도 자세히 기록되어서 동양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선조들의 훌륭한 자료로 보여주는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에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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