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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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 없이 펼친 첫번째 수록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내게 황홀경을 선사했다. 사실 요즘들어 젊은 소설가들의 글을 읽는 데에 조금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퀴어 내지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담고 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대다수의 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기구한 사건(성희롱, 성차별, 가정폭력 등등)에 휘말리고 남성 인물들은 악하게 비춰진다고 느껴졌는데, 처음에는 물론 그런 시선에 공감도 하고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일면을 과감히 표현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으나 그런 소설들이 계속 반복되니 그들이 담고 있는 우울 내지는 분노의 톤이 이제는 작위적이고 지겹게 읽혔다.

그러던 중에 만난 이 단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내게 가뭄의 단비 같은 소설이었다. 박완서 작가님의 인생을 이 단편 하나로 요약한 듯한 자전적인 이야기였는데, 그래서일까 훨씬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로써 모든 서사가 자연스럽게 읽혔다. 이를테면 ‘할아버지’가 그러하다. 유년기 시절의 일화 속 할아버지는 뼛속 깊은 유교 전통 아래 남녀차별을 일삼는 인물이 아닌, 그저 손녀를 몹시 이뻐하고 부인(할머니)에게 종종 혼나기도 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작가님이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글을 쓰던 중에 추억에 잠겨 행복한 기분이 듦으로 인해 글까지 그 기분이 전염된 것일까, 그 글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인 나 또한 같이 행복해진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내내 행복하기만 한 것인가 물으면, 그렇지 않다. 보통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고난 내지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惡)이 등장한다. 국어 과목과 별도로 ‘조선어’가 존재하던 당시 사회가 그러했고, 삼촌을 돌아가시게 만든 ‘전쟁’이 그러했으며 남편과 아들의 ‘죽음’이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내게 ‘희노애락’ 중 어느 하나만이 아닌 모두가 담겨있는 입체적인 소설이었고, 그런 점이 내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단편’의 분량에서는 보통 사건 하나의 분량만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데,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인생의 여러 복합적인 면모를 담아냈다는 것이 지금껏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주로 읽어 온 내게 아주 긍정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이래서 박완서 박완서 하는구나 싶다. 앞으로 읽을 수 있는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이 많다는 사실에 너무도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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