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지음 / 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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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혼자에게> - 이병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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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등 일반 산문의 문장과 소설 속 문장의 결은 아주 많이 다르다. 소설의 경우에는 독자들의 마음에 가닿는다 하더라도 이야기 속 장면에 맞는 문장이다보니 독자가 그 상황에 본인을 맞추어 몰입을 해야하는 반면, 일반 산문의 경우에는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독자들은 그 마음을 소설보다 더욱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닌, 그저 개인적으로 느낀 둘의 차이를 설명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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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 선배님의 추천으로 이병률 작가님의 산문을 처음 읽어보았다. 시도 쓰시는 분이라 나랑은 결이 맞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너무도 시적인 산문 <시와 산책>이 나랑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배님이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씀해주셔서 그 말을 믿고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내 마음을 울리는 듯한 문장들을 정말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을 주로 읽는 나에게 이 책은, 소설 속 문장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그 많은 문장들 중 일부를 공유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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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 하지만, 떨어지는 것은 절대로 중요한 일이다.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당선의 의미만큼이나 중요하며 역시나 안 되었다는 것은 되기 위한 과정으로도 중대하다. (중략) 안 될 수도 있는 일에 말도 안 되는 확률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어느 한 단면은 바뀐다. 그 상황은 자신의 현재를 확대해서 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내부의 힘까지도 뭉근하게 키운다. 어딘가에 떨어져보지 않는 우리는, 어디에선가 망해보지 않은 우리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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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3p]

📖 밥을 먹을 때 그 사람과 함께여서 맛이 두 배가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별 음식도 아닌데 그 사람하고 함께 먹으면 맛있는,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

📖 슬픔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슬픔을 알더라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또 어딘가에는 슬쩍이라도 칠칠맞지 못하게 슬픔을 묻힌 사람이면 좋겠다.

📖 벌이 날아들었을 때 “움직이지 말고 그냥 눈감고 있어”하고 내가 소리치면, 나를 믿고 벌이 떠날 때까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 어떤 비밀에 대해 내가 이야기할 때 ‘누구한테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라고 못박지 않아도 좋은 사람.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거나 두 사람이 아주 완전히 분리될 일이 생길 때, 서로의 어떤 부분에 대해 남에게 함부로 말로 옮기는 일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

📖 평상시에는 보통 눈을 가진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을 들여다볼 때나 세상을 내다볼 때는 광각렌즈와 망원렌즈, 모두의 사용이 가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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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p]

📖 설령 당신이 어느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하나 남기는 것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 당신을 떠올릴 때 슬픔 대신 어느 믿음직한 나무 한 그루를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나는 바란다.

📖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순간에 단어 하나가 멤돌더라도 그 단어를 마음 속에서 꺼내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죽음 앞에서 확연히 떠오르는 뭔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거나 다 풀고 갈 상황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살면서 미처 다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어리석게도 영원히 내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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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p]

📖 “아마, 공연이 잘 안됐다면 그건, 자기 자신한테 집중이 안 되서였을 거예요. (중략) 우린 늘, 자기 자신한테 집중을 못해서 못마땅해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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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p]

📖 그 누가 됐건, 누군가 먼길을 떠나는 것은 커다란 의미다. 먼길 위에서 안전해야 하고, 성과를 가져와야 하고, 또 남겨두고 온 가족을 많이 생각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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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p]

📖 다른 사람 너머를 보고 싶어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른 사람의 속을 읽고 싶은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게 다 좋아해서였겠지만 그게 다 관심 있어서였지만 단지 그런 자잘한 욕심들로 힘든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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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p]

📖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싶어하는 바람에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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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p]

📖 만나고 있다고 다 사랑하는 건 아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그녀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왔다면 이미 잔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고 그걸 주섬주섬 봉합하려는 너는, 이성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네 영혼이 시켜서가 아닌 거다. 무슨 얘기냐 하면 가만히 네 영혼에게 물어보라는 이야기다. 네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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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p]

📖 그때는 그랬을리 없는 상황들을 이제는 꺼내보며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재배치한다. 나의 고집으로 인해 별로 좋게 기억될 만한 사건이 아닌데도 시간이라는 망사를 이용해 그때 일을 통과시켜 재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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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p]

📖 사실 우리는 잘 만나다가도 어느 순간 둔해진 관계라서 안 만나게 되고, 또 멀어지게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아예 둔한 사람 자체를 멀리하게도 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안 섬세한 사람들’에게 있어 섬세한 사람이란 ‘그거 참 머리 아픈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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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p]

📖 그래, 맞아. 저토록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 삶. 바로 내가 살고 싶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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