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씨가 동료 소설가 김주영 씨를 회고하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영남대 정치학과 교수 이수인, 소설가 이문구, 김주영이 한 자리에 모여 회식하는 자리입니다.이수인 씨가 김주영 씨에게 "저는 직업상 매일 신문을 읽습니다.화장실에서 읽으니 전화가 없어서 조용하고 좋더군요.하지만 김주영 선생의 연재소설 <객주>는 화장실에서 읽지 않습니다.그런 역작을 어떻게 화장실에서 읽습니까" 하고 말했다는군요.면전에서 하는 간지러운 아부가 아니었습니다.<객주>는 작가의 엄청난 사전취재와 공부가 바탕이 된 작품이니까요.
김주영 씨는 <객주>를 쓰기 위해 전국의 시장을 다 돌아다녔습니다.녹음기와 두툼한 공책 그리고 필기도구...그런데 그가 간 곳 중에 인천 영종도 젓갈 시장이 있군요.아...그 비행장 있는 영종도! 예전엔 그런 시장이 있었구나...지금 그 곳은 무슨 장소가 되어있을지...시골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5일장만 있는 줄 아는데 장 서는 날도 조금씩 다릅니다.이곳 광주 부근에는 화순장 이양장 날짜가 다릅니다.예전엔 남광주 역에서 시골장에 장사 나가는 아낙들이 완행열차를 기다렸지요.이제 남광주 역이 없어졌으니 기차를 기다리던 아낙들도 없습니다.
김주영 씨는 서른이 넘어 등단했습니다.작가로서는 늦게 출발한 셈이지요.결혼도 일찍 한 데다가 10년 가까이 안동에서 엽연초생산조합에서 근무한 까닭입니다(경북 북부는 예로부터 담배재배가 유명합니다).이 엽연초생산조합에서 근무한 경험담을 재밌게 쓴 중편이 '칼과 뿌리'입니다.담배수납을 나온 공무원과 농민들 간에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한 줄다리기가 실감나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농촌에 대해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주의 소설 한 편을 읽는 것이 좋은 약이 될 듯합니다.
소설가들이 묘사하는 기자는 대체로 악질이 많습니다.되어먹지도 않는 주제에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사기치는 존재로 묘사되지요.국내외를 막론하고 소설에는 이런 추한 기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발자크 <환멸>, 모파상 <벨아미>, 뵐 <카타리나 불름의 잃어버린 명예>등 등...위에 언급한 '칼과 뿌리'에도 농촌을 돌아다니는 지방지의 사이비 기자가 등장합니다.그 기자가 어찌나 밉살스럽게 묘사되어 있던지 옆에 있다면 콱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입니다.이런 작품을 읽으면 '소설에 나타난 기자 이미지'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70년대에 젊은 작가였던 김주영 씨도 이젠 7순입니다.윗 글에 나오는 이수인, 이문구 씨는 이제 고인이 되었고...황석영 조선작 김주영 조해일 등 세칭 70년대 작가들의 젊은 시절 중단편은 벌써 옛날 같은 느낌이 듭니다.얼마전 어느 대학생이 이야기하기를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스치듯 배운 작가들의 70년대 작품을 대학생이 되어 제대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시대적 배경이 너무 옛날 느낌이 나서 잘 와닿지 못했답니다.솔직한 이야기지요.대학생까지 갈 것 없이 30대 초반들도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벌써 90년대를 추억상품으로 팔아먹는 시대인 걸요.이제는 일제시대나 70년대나 다 옛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