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인에 의하면 1986년 경 대학도서관에 가서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을 빌리려 했더니 금서라서 대출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원 세상에...그런 시절이 있었다니...나는 그 책들을 서른이 넘어서 읽었습니다.한참 독서에 탄력이 붙던 시절이었고, 이미 리영희 동지( 나는 동지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의 칼럼을 통해서 군사외교 분야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접했는지라 말로만 듣던 그의 대표작을 읽어보자고 결심했지요.상당히 꼼꼼하게 정독했습니다.이미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책을 그렇게 읽는 사람은 없었으니 내가 유별난 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실제로 읽어 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왜 그럴까... 이 책은 차분한 독서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이 책들이 필독서였던 시절. 중국과 베트남 전쟁에 관한 몇 몇 내용만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읽은 사람들은 내용이 꽤 어려워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특히 이 책이 대학 신입생 필독서였다는데 교과서 참고서로만 두뇌를 채운 고교시절을 방금 지난 사람들이 소화하기엔 당연히 힘들었겠지요.군사외교 분야가 오직 어렵습니까.나 역시 대학 신입생 때 읽었더라면 중도에 포기했을 겁니다.그래놓고도 "나도 리영희를 읽었다구" 하면서 자랑했을지도 모르지요.어차피 그 책을 정독한 사람이 드물었으니 거짓말도 통했을 겁니다.
나는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갈등에 관심이 많아 관련 문헌을 읽었던 상태였습니다.그랬기 때문에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 이후의 저서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쉽게 여겼던 것도 사실입니다.오히려 나는 제네바 협약에 대해서 베트남을 둘러싼 서방진영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자세히 해설한 리영희의 깊이있는 지식에 감탄했습니다(<전환시대의 논리> 제 4장).그리고 한일관계사,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안보정책을 다룬 글들도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식의 안이한 민족주의 정서에 상당히 비판적이며 특히 무분별한 반일주의에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우리는 일본만은 이겨야 한다 운운...하는 스포츠 반일주의가 한일관계사의 진정한 모습을 은폐한다며 강하게 비판한 적도 있었지요.윌프레드 버체트의 명저 <히로시마>에 쓴 추천서에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정당하다고만 생각하는 한국인 일반의 정서를 꾸짖는 내용도 있습니다(<대화>에서 리영희는 직설적으로 우리나라 진보지식인들은 일본의 이와나미에서 출판한 책들에게 크게 신세를 졌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몰래 일본 책들을 표절하고서도 겉으로는 반일주의자인 척하는 이들이 많은 현실을 생각해 보면 정말 솔직하다는 느낌)
만년에 임헌영과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에는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이 나와 있습니다.사상의 자유가 없는 북에서 나온 학술서적들의 수준이 이제 정체상태라고 비판했습니다.특히 이 대목에선 국내 일부의 주사파들을 겨냥한 듯한 비판도 있습니다.임헌영이 도모노 로의 추리스파이 소설 <코리아 파일 38>에서 나오는 "맥아더 이승만 장개석의 음모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소개하자 리영희는 어불성설이라며 북침설에 기반한 논의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고 했습니다(이 소설 읽어봤는데 상당히 재밌습니다.물론 음모설은 수용하기 힘듭니다만).또 우리나라는 문화민족이라는 투의 정서에도 거부감을 표시한 대목이 있지요.
리영희 동지는 수필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범우문고에는 그의 명수필 몇편을 뽑은 게 있지요.팝송 등 양키문화를 꼬집은 수필을 읽으면서 웃었던 생각도 납니다.70년대의 글이라 당시 팝송과 같은 양키문화에 물든 세대들이 지금은 거의 환갑이니까요.시국사범으로 잡혔던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울던 사연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찡합니다.그 사연은 <대화>에 자세히 나와 있지요.
그의 글과 책을 꽤 읽었습니다.그중에는 내가 찬성하기 힘든 내용도 있었습니다.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에서는 베트남전쟁이나 중국문제보다는 한일관계사, 미국의 군사정책 관련 글들에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지금 읽어도 도움되는 내용이 많습니다.그 분야가 어려우면 우선 빼놓고 수필류에 해당하는 글을 읽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범우사에서 나온 수필선도 이 두 책에 뽑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상과 이성>(1977)과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국한문 혼용이며 일본인 이름을 그냥 한자로만 적은 곳도 있고, 중국인명은 중국발음이 아닌 우리말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이런 데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 읽기엔 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그리고 <전환시대의 논리> 출판년도는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기 전이라는 것도 유념하면서 읽으시길. 이 책들에 실린 글의 출처를 유심히 보면 신동아,여성동아 등 동아일보사가 운영하던 월간지도 있습니다만 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될 겁니다.그때는 조중동문...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리영희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다는 것도 너무 복잡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남북의 화해를 그토록 소망했던 리영희 동지의 별세 소식을 들은 지금...역대 최대 규모의 미일 합동군사훈련이 오키나와 해역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그 며칠전엔 서해에서 한미합동훈련이 실시되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산동과 심양에선 중국의 대규모 군사훈련이 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직전 연평도 포격...참 얄궂은 세상, 하필 이럴 때 리영희가 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