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와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맞붙었던 1956년 대선의 투표율은 무려 94.4%. 그 당시엔 교통이 불편해서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1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 투표소에 갔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70이상의 노인들도 노구를 이끌고 먼길을 걸어서 투표장에 나왔다고 하니 대단한 정신이지요.문맹자들은 후보자의 번호를 외워서 투표했습니다.
이렇게 높은 투표율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급서하고 본의 아니게 조봉암이 단일후보가 된 점도 있었고 또 조후보가 과감하게도 평화통일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점도 있습니다.조봉암은 관권선거가 판을 치는 난관을 뚫고 선전하여 이승만과 자유당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지요.결국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959년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이 당시만 해도 영남지역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혁신진보세가 대단히 강했지요.조봉암 지지표가 이승만을 앞섰으니까요.지금의 정치지형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에 투표소가 있고 사람들의 학력이라든가 생활수준도 더 높아졌습니다.이렇게 여건은 더 좋아졌는데 투표율은 더 낮아져서 심지어 대의정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니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