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차대전~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는 책은 물론 스릴러 물까지 읽고 있습니다.에릭 앰블러는 스파이 소설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필독서에 들어가는 소설들을 썼지요.그는 한때 이렇게 불만을 털어 놓은 일이 있습니다."조셉 콘라드는 스파이 소설의 고전을 썼다.<서구인의 눈으로>,<밀정>등은 우수한 스파이 소설이다.그런데 영문학사에는 콘라드 작품선에 이 작품들이 빠져 있다...."세계문학사에서는 취급 안 해준다는 거죠.하지만 이제는 영문학사에서도 이런 편견은 없어졌습니다.영어권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가까운 일본만 해도 청소년 필독서에 자국의 추리작품을 집어넣으니까요.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추리물을 읽으면 뭔가 격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그런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세같은 것이 아닐까요...
어제 에릭 앰블러<디미트리오스의 관>(1938년작)을 읽었습니다.스파이 소설의 고전이지요.그 전엔 로맹 롤랭의 중편<피에르와 뤼스>를 읽었습니다.1차대전 막바지인 1918년 파리에서 징집영장을 받은 18세 소년 피에르가 참전을 앞두고 동갑내기 처녀 뤼스와 짧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로맹 롤랑은 이름은 많이 들어보지만 그의 작품은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지요.그 직전엔 스페인 내전 때 공화파에서 보낸 밀사가 프랑코 군에게 가는 석탄선적을 막기 위해 영국으로 밀파되는 내용의 그레엄 그린<밀사>(1938년작)를 읽었습니다.이 소설은 순수문학과 오락문학을 나누기 좋아하는 이들에겐 참 애매한 작품입니다.하지만 그런 것 따지지 않는 저에겐 치밀하게 잘 짜여진 소설입니다.
<피에르와 뤼스>나 <밀사>는 요즘은 구하기 힘든 작품입니다.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순수문학이고 후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중간이고 앰블러는 대중문학이겠지요.하지만 다 좋은 작품입니다.그렇게 복잡하게 순수니 대중이니 가를 필요도 없구요.
저는 인문사회과학 서적 외에 소설도 상당히 많이 보는데 추리물이나 스파이물도 즐겨 읽습니다.그러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을 떠올립니다.'소설 읽듯 술술 읽는다 운운..."하는 말.이거 잘못된 말입니다.저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보다 소설 읽을 때 훨씬 더 정신을 집중해서 읽습니다.안 그러면 줄거리를 놓쳐 버립니다.추리물은 더 그렇지요.그리고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잘 아시겠지만 소설도 아무나 읽는 게 아닙니다.소설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가장 쉽게 접할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두뇌소모가 많은 것이 소설 읽기입니다.
추리물이나 스파이물은 한 번만 읽고 버리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특히 스파이물은 국제정치나 외교가 배경이 된 것이 많은데 위의 소설도 저는 몇 해만에 다시 읽었으며 <디미트리오스의 관>은 네 번째 읽었습니다.읽을 때마다 예전엔 안 들어왔던 사건이나 지명이 눈에 들어옵니다.그런 것은 나중에 따로 관련서적을 찾아 읽고 기록합니다.대중소설 가지고 유난떤다고 하는 이들도 있겠습니다마는 얻을 것은 다 빼먹자는 게 제 독서관입니다.그리고 잘 된 스파이물은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똑같은 책을 두고도 읽는 이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대중소설이라고 얕잡아 보지 말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면 훌륭한 교재가 될 수도 있는 분야가 추리,스파이물입니다.단 이런 분야의 독서가 늘 그렇듯 우선은 지명,사건,인명의 바다에 익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이런 것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배경지식은 책을 읽은 다음에 궁금증이 생겨서 관련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얻을 수도 있으니 굳이 배경지식이 먼저라고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허세와 편견을 버리면 독서의 폭도 더 넓어집니다. 어려울 거라는 편견을 버리고 고전명작도 하나 하나 읽어나가면 의외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소설을 순수소설과 대중소설로 가르지 말고 두루두루 섭렵합시다.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