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더클래식 뉴 도네이션 세계문학 컬렉션 39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소영 옮김 / 더클래식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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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경리 선생이 일본 문화의 비어있음이 문인들의 자살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한 바 있다. 젊은 문인의 자살은 탐미적으로까지 느껴지니 경계해야 함에도, 선생이 인정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다자이 오사무였다. 그래서 읽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화자인 요조의 수기 형식을 빌어 쓴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다. 책장을 넘기면서는 작가가 던지는 딜레마적 물음 때문에 잠시 생각에 빠져야 했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의 특이함에 대해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요조는 묻는다. 그 ‘세상’이 혹시 ‘너’ 아닌가 하고. 다수의 시선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가장하여 ‘나’의 고유함, ‘나’의 차이를 지우려는 수작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나를 감추기 위해 바보짓, 광대 짓을 하는 나, 그것이 세상을 향한 구애. 그것이 ‘일부러 그랬지’라는 말로 꿰뚫어 보여졌을 때의 부끄러움. 

  정을 나눈 여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하여 혼자만 살아남았을 때의 아득함. 자살방조죄를 피하기 위해 각혈을 연기하는 자신에게 검사가 물었던 “진짠가?”라는 질문에서의 절망.

  천진하게 인간을 믿은 죄로 아내(?)는 강간을 당하고 그녀의 ‘순수한 신뢰’를 사랑했던 요조가 느끼는 더럽혀진 느낌. 그때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죄인가. 

  결국 모르핀 중독 신세가 된 요조는 친우 호리키를 ‘신뢰’한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히고 그 순간 그는 인간, 실격이 되고 만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병원에서 풀려나 짧은 수기를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요조.

  요조가 써야만 했던 숱한 가면과 고뇌했던 질문들, 술취한 그가 친구와 했던 반대말 놀이는 가슴 아프고, 깊이 생각하게도 된다. 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다자이 오사무는 책의 결말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말하고 결국 39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담담하지만, 시대를 가로질러 여전히 같은 의문과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인간 세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보다 인간이 다른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시대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시대를 묻기 전에 나는 과연 타인과 교감할 수 있을 것인가.

  짧은 분량의 소설,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다. 

  누군가와 반대말 놀이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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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 시간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11
알폰소 루아노 그림,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글,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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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로 유명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동화. 작가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굳이 성인에게 동화를 추천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서 읽었는데, 동화의 매력과 이야기의 구조에 깜짝 놀라게 된 작품. 원래 성인을 위한 단편으로 쓰였다가 편집자의 손을 거쳐 동화로도 발행 되었다.

독재를 경험한 같은 인간으로써, <글짓기 시간>에 나오는 주인공 페드로와 그의 주변인물들, 가족의 상황은 쉽사리 짐작이 간다. 페드로에게 닥친 시련은 직접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건조하게 풍경처럼 묘사 되지만, 그에 함의된 내용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에 대한 페드로의 반응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군인이 학교에 나타나 글짓기를 시켰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가장 큰 반전은 마지막 장, 페드로의 글. 

놀라운 동화 한 편을 읽었다. 아이들은 뭘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오만함을 거두기로 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다 알고, 무엇이 옳은지 나쁜지도 알며, 위기에 닥쳤을 때 어떤 기지를 발하면 좋은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동화. 알폰소 루아노의 그림도 담백하면서 보기 좋았다. 느낌있는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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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박경리 지음 / 현대문학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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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는 것은 작품을 통해 만나는 것이 좋을 때가 많지만 예외인 경우가 있다. 작품을 읽고 나니 작가의 사상을 더 알고 싶을 때. 고인이 되셨지만 다행스럽게도 박경리 선생이 1992년부터 93년까지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창작론 강의를 하셨던 것이 책으로 출판돼 있었다. 문학이론서를 공부하겠다는 의도 없이, 선생은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남기셨을까 막연한 궁금함에 우선 책을 구입했다. 책장을 넘기고 몇 챕터 읽지 못하다가 아마 5년 넘게 책꽂이에 꽂아만 두었을 것이다. 옆의 책을 집어 들다가 슬그머니 도로 넣고, 이 책을 잡아 읽기 시작했다.

창작론 강의라고 하였으니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시간을 들이고 곱씹으며 수업으로 들었을 테고, 나는 시간을 압축하여 선생의 말씀을 책으로 만났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밝혔듯 선생은 문학은 체계적인 학문이 아니며, 작법 비기를 얻길 원했다면 그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선생의 신조는 틀을 깨라는 것이다.

대신에 생명에 대해 문학에 대해 깊은 통찰과 사유를 바탕으로 여러 이야기를 남기셨는데, 글을 쓰는 사람을 위한 말씀 뿐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을 위한 말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말씀 같기도 하다. 인상적인 구절이 많아 책에 밑줄을 치면서 읽었는데, 책장을 덮고 되짚어 보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인간이라고 교만하지 말 것, 생명을 소중히 여길 것,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아있다는 실감, 틀 안에 갇히려 하지 말 것, 테두리를 거둬내고 상상하고 창조하라는 말씀이다. 삶이 그러하듯 문학은, 그 안에 등장하는 인간은 입체적이기에 평면적인 것을 거부하고 가로 놓기와 세로 놓기를 해보라는 말씀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글을 쓰지 않더라도 삶을 바라볼 때, 작품을 읽을 때, 살아갈 때,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모두에 통용될 수 있는 고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입체적 균형 잡기이기에 균형을 잡기 위해 생동하는 긴장이 유지되는 것이라 하셨는데, 분명 삶 속으로 가져와야 할 말씀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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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폴 서루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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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반해서 일본어로 번역하고, 여행작가의 책이라는 점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세상의 끝이라 했기에 사실 여행에세이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이것이 수려한 단편소설집인 줄은 몰랐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은 기쁘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은 아니다. 읽을수록 씁쓸해지고,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이들과 다른가 반문하게 된다.

13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소설이 수록된 소설집. 각기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각기 자기만의 편견과 오만에 빠져있다. 때로는 화자가 되어 때로는 관찰자가 되어 이들 인물 군상을 보여주는데 종국에는 어리석은 인간, 자의적 해석에 빠져 자기만의 우물에서 나오지 않는 인간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 각기 다른 상황과 도시, 관계에 처한 인물들이 이토록 한결같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여행소설을 기대했다면 각 도시를 예찬하듯 혹은 경험하듯 서술하는 책이 아니라서 더 기뻤는지 모르겠다. 각기 다른 도시에 사는 인물을 창조해 낸 작가는, 도시의 분위기도 전달하지만 각각이 마주한 ‘세상의 끝’을 살아내는 인간을 말하기에 더 울림 있게 다가오는 책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읽었을 때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왜 그런 소설을 썼는지, 내가 그 속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면 폴 서루는 그에 비해 훨씬 친절하다. 정서와 인간 군상이 고스란히 읽힌다. 사변적이지 않은 소설의 모범을 본 기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첫 번째 단편 ‘세상의 끝’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가장 푸른 섬’은 마지막에 책장을 자꾸 접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서늘한 자의식의 공포를 느끼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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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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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출판사에서 1996년에 1판 1쇄를 펴내고 64쇄까지 찍은 후 개정판 2쇄까지 나온 책. 노르웨이의 작가가 쓴 페미니즘 소설이다.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단순 미러링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이갈리아라는 나라에서는 남녀의 성역할이 바뀐 제도 하에서 그것을 상식으로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1부에서 소설적 흐름이 끊긴다고 느낄 때도 있다. 주인공격인 페트로니우스가 3명의 움에게 강간을 당한 후의 장면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삶이 소설보다 훨씬 비참하고 통탄스러운데 가볍게 묘사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1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책을 소장할 가치가 있는가 갸웃하게 된다. 작가가 1975년에 쓴 책이라고 하는데, 43년 후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보다 못한 여성의 삶이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부로 접어들게 되면 독자로써 본격적인 갈등을 하게 된다. 이갈리아에서 핍박받아 온 맨움(남성)들이 맨움해방운동을 조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1부를 읽고 이갈리아 체제의 관찰자적 옹호자가 된 나는, 이들의 체제 전복적인(?) 행동에 불안을 느꼈다. 인간이 어떻게 보수화 되고, 여성운동이 어떤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지를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나를 발견하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 책을 끝까지 읽게 된다. 2부는 보다 이론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이 이어진다. 소설의 끝 무렵에 페트로니우스는 <민주주의의 아들>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이갈리아의 딸들>의 첫 장면을 성별만 바꾸어 쓴 것으로 설정된다. 즉, 현실의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과 처지로 돌아온 것이다. 책의 말미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절망과 암담함을 느끼고 말았다. 

다수에 의해 폄훼되고 곡해되는 여성운동이 원하는 것은 계급, 인종, 성별, 성적 취향 등으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본주의가 핵심으로 자리한다는 것을 작가는 끝까지 놓지 않으며, 그것이 곧 모든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 맺음 한다.

사 놓고 2년여 동안 읽지 않다가 쌓인 책 읽기 프로젝트로 읽었는데 찬찬히 살펴보며 읽을 만한 책이었다. 작가가 마련한 역지사지의 장치.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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