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인생을 , 씀으로써 답이 되게 만든 것이다.
어떤 호기심은 금방 해결되고 또 어떤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는 진리 탐색의 도구인 동시에 그 자체로 종착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참된 이치, 소중한 가치들을 찾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것은 영원히 닿지 못할
다음 페이지가 아니라 내 손때와 잉크 자국이 묻은, 이미 지나온 장들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앞선 페이지를 성급히 뒤적이는 건 금물이다.
어느 정도의 채움과 익힘은 필수다.
그 숙성의 시간 속에 이렴풋하던 진리가 또렷한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한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사이에.
p103-104
묵은 원고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다.
컴퓨터 바탕화면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파일을
도저히 열지 못하고 주저하는 나의 고민들이
왜 그럴까를 자책하며 되묻던 나에게 얼마만큼의 시간과 여유를 줘야 하는 걸까.
사실 두려움의 허들을 넘기 힘들었다.
스스로가 만든 경계속에서 허물지 못하는 쓸데없는 완벽주의.
쓰면 쓸수록 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을 말이다.
주변의 응원과 관심이 더 무겁게 느껴지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조용히 숨고 싶은 나의 초라함이
스스로를 쓰지 못하는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나도 용기내보고 싶다.
계속 쓰다 보면 가닿게 될 그 끝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글쓰기에 대한 목마름과 장벽을 넘고 싶은 욕망과
현실 속에서 안주하고 그만하자고 타협하는 주저함이 평형대 위에서 늘 다툰다.
감내해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았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을 생각하면서도
끝내 하지 못하면 더 큰 아쉬움 속에서 속절없는 시간을 원망하며 보낼 것 또한 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쓰는 내가
이미 훌륭한 사람임을 담담하게 전하는 작가의 말이
숨겨둔 원고 뒤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보게 된다.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러하다.
쓴다는 건 스트레스다. 음식 스트레스는 먹어 없애고 알코올 의존증 우려는 술로 지운단 우스갯말도
작가의 쓰기 앞에선 예외다. 탈고까지는 스트레스를 글쓰기 감독관 삼는 게 속이 편하다.
집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건 감독관이 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어떤 압박에서도 자유로운, 지면을 잃은 작가를 상상해 보라.
자유는 형벌이며 창작의 고통은 축복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글을 짓는다.
죽이 되든 밥이 된든 짓다 보면 레시피와 다른 리소토가 완성되기도 한다.
p273-274
세상사가 쉬운 일이 없다.
즐거움과 호기로움으로 시작했던 쓰기가
불면에 시달릴 고민거리로 가득차게 만들 줄 몰랐다.
쓸데없는 자기 검열에 빠져서
오랜시간 멈춰있는 내 원고를 바라보면 한숨만 나온다.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 수 없어서
이렇게 이 책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닿고 싶은 내 본심일지도 모른다.
쓰는 창작자들의 고뇌와 현실을 찾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를 괜찮다고 다독여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다.
이 몸부림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지만,
쓰고 싶은 갈증은 이내 결과물로 만들어져야 받아들이게 되는걸까.
형벌이자 축복인 글쓰기의 비유가 너무도 적절해서
웃픈 이 마음을 누가 알아 줄까 싶지만,
계속 써야만 하는 나의 욕구를 필요로 채울 글쓰기는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함이 분명한 길이다.
작가이자 북카페의 주인으로서
여러 경험치들을 가진 저자의 마음가짐이
뭉클한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안도감도 느끼게 만든다.
멋진 인생 이야기들도 좋지만
때론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로
자신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실체들이
그 사람을 더 빛나게 가꾸고 있는 날것의 이야기가 좋다.
그런 점에서 쓰고자 나아가고자 하는
소설가를 꿈꾸는 작가의 담백한 고백이 진실되게 느껴져서 좋다.
부끄러운 나의 고백을 용기낼 수 있게
많은 좌절과 고뇌에 빠진 수많은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대신할 작은 이야기로 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