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황야의 이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4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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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과거 모든 행적이나 출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개성은 내게 강렬한 인상, 그것도 하여튼 호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리와 같이 교양 있고 총명한 인간이 자신을 ‘황야의 이리’로 여길 수 있다는 사실, 그가 자신의 풍부하고 복잡한 삶의 형체를 이렇게 단순하고 조야하며 원시적인 공식에 가둘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놀라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고도의 사유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가장 지적이고 가장 교양 있는 인간조차 언제나 매우 소박하고 사태를 단순화하며 왜곡시키는 상투적 렌즈들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법이다.

특별히 재능을 타고나고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인간 영혼들이 자신의 분열상을 예감하기 시작하는 경우, 그리고 모든 천재와 마찬가지로 이런 영혼들이 통일된 인격이라는 망상을 파괴하고 자신을 여러 부분, 수많은 자아의 묶음으로 느끼는 경우, 이들이 이런 사실을 단지 주장하기만 해도 대다수 사람은 당장 이들을 감금한다.

대중은 학문의 힘을 빌려 조현병(정신 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고 인류가 이 불행한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외침을 듣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몸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실체지만 영혼은 결코 그렇지 않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각 인물이 어쩔 수 없이 일회적이고 통일적이며 폐쇄적인 육체에 갇혀 통일성을 가장하기 때문에 이런 인상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박한 수준의 미학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 또한 개별 인물이 두드러질 정도로 독립적인 통일체로 무대에 등장하는 이른바 성격극을 최고로 평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실은 눈에 보이는 육체에서 출발해 자아라는 픽션, 개별 인물이라는 허구를 창안한 고대 사상가들의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당한 것이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교사들이 즐겨 인용하고 속물들이 전율을 느끼며 찬미하는 다음의 구절, 즉 "아, 내 가슴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다!"는 구절을 말하는데, 이 경우 그는 메피스토와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수많은 다른 영혼을 잊고 있는 것이다.

가슴, 육체는 언제나 하나인 것이 맞지만, 그 안에 거주하는 영혼은 둘 또는 다섯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간은 수백 겹의 껍질로 이루어진 양파이자 수많은 실로 짜인 직물이다.

그는 자신의 한 부분을 인간, 다른 한 부분을 이리라고 부르면서, 이로써 이야기는 벌써 끝난 것이고 그 자신은 소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정신적이고 승화되거나 문명화된 것은 ‘인간’에 집어넣고, 모든 본능적이고 야성적이고 혼돈스러운 것은 ‘이리’에 집어넣는다

우리가 우려하는 바는, 하리가 혹시 영혼의 영역 중에서 아직 인간적인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영역까지 ‘인간’에 포함시키고 벌써 오래전에 이리적인 것을 넘어선 자신의 본질까지 ‘이리’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내면 깊은 곳의 숙명은 인간을 정신을 향해, 신을 향해 내몰아 가는 반면, 내면 깊은 곳의 동경은 인간을 자연 쪽으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도록 이끈다.

인간은 이 두 강력한 힘 사이에서 비틀거리면서 불안과 전율의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이 제각각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시민들의 다수가 합의한 덧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인습에 따르면 날것 그대로의 거친 본능들은 거부되고 금기시된다.

시민들이 오늘은 어떤 인물을 이단자로 화형에 처하고 범죄자로 매달고는 내일 지나 다음 날에는 그를 위해 기념비를 세워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는 정신이 요구하는 최고의 요구, 다시 말해 진정한 인간 되기를 긍정하고 추구하라는 요구, 불멸에 이르는 그 유일한 좁은 길을 걸어가라는 요구와 맞닥뜨리는 것에 겁을 먹고 있다.

그는 그 길이 더 큰 고난과 박탈의 삶, 궁극적인 희생, 어쩌면 단두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는 모차르트가 헌신과 고통을 감수하는 위대성을 가졌다는 사실, 모차르트가 시민적 이상들에 대해 냉담했다는 사실, 또 모차르트가 저 극단적인 고독, 다시 말해 인간이 되는 길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시민적인 공기를 희석시켜 얼음장처럼 차가운 에테르로 변모시키는 그런 고독을 견뎌 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라는 통일체 속에 한 영혼의 통일체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은 기껏해야 이런 이상적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긴 순례 여정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관찰했더라면 그는 아마 짐승들도 결코 통일적인 영혼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의 멋지고 팽팽한 형태의 육체 안에도 다양한 성향들과 상태들이 깃들어 있다는 것, 이리 역시 자신 안에 심연을 갖고 있다는 것, 이리 또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아니,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구호와 더불어 인간은 언제나 고통이 가득하고 희망은 없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

행복한 유년 시절을 노래한 그 사람, 호감은 가지만 다분히 감상적인 그 인물 역시 자연으로, 순진무구한 상태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어린아이들도 많은 갈등, 엄청나게 모순적인 분열,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던 것이다.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이리로 돌아가는 길도 없고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길도 없다. 사물들은 시작 단계라고 해서 순진무구하고 단순한 상태에 있지 않다

모든 창조물, 심지어 가장 단순해 보이는 것도 벌써 죄과가 있고 벌써 분열되어 있으며 생성의 더러운 물결에 내던져진 상태여서 결코 그 물결을 거슬러 헤엄칠 수 없다.

그대가 자살한다고 해도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그대는 더욱 멀고 더욱 수고로우며 더욱 무거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대는 어쩌면 언젠가 종국에 이르고 평온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그대의 세계를 제한하고 그대의 영혼을 더욱 단순화하는 대신 고통스럽게 확장된 그대의 영혼 안에 더욱 많은 세계, 결국에는 세계 전체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모든 탄생은 우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고, 제한에 갇히는 것, 신으로부터의 격리, 고통을 겪으면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한다

수백만이라는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것들은 재료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더 차원 높은 인간에 관한 것, 인간 되기라는 긴 여정의 마지막 목표에 관한 것, 존엄한 인간에 관한 것, 불멸의 존재들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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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백치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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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우 수다스럽고 불안정해 보였으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싸우는 것처럼 요란하게 지껄여 댔다.

즐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악의 없는 거짓말은 다소 무례하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진 않지요.

무덤가에 묘비를 세우고, 앞면에는 〈여기 10등관 레베제프의 다리 묻히다〉라고 새기고 뒷면에는 〈기쁨으로 넘치는 그날이 올 때까지 고이 잠드소서

지금 당신 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생각이 모욕적이고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지고, 동시에 그 인간이 위대한 사건의 목격자였다는 걸…….

어쨌거나 수행원 중에는 장군들 외에도, 지형과 군대 배치를 살피고 상의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대동하던 원수들의 얼굴도 빠지지 않고 보였소.

오랜 협의 끝에 마침내 나폴레옹은 다부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을 내린 듯이 보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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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백치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6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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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 어린 그의 얼굴 표정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열 시간이라도 계속 한자리에 서서 기꺼이 즐겨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흘 전까지 어떻게 자기가 죽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는지 놀랄 따름이라고 대답하며, 이날 저녁처럼 기분이 좋았던 때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귀찮게 구는 것 같아 무척 죄송하고 분별없이 생각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겠군요. 친절하신 공작, 나는 당신의 우정을 구하러 왔습니다. 당신은 매우 보기 드문 분입니다.

위로 땀이 흘렀다. 번쩍거리는 두 눈에는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지속적인 동요 이외에도 분명치 않은 초조감이 어려 있었다

레베제프는 평상시 저녁때의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고 앞서의 〈학문적인〉 장황한 논쟁 때문에 속이 뒤집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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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백치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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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빠블리쉬체프의 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이 허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결심을 번복하지 않고 빠블리쉬체프를 기리는 마음으로 1만 루블을 드리겠습니다.

자기가 스위스에서 치료받았던 것과 똑같은 병이 그에게도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부르도프스끼를 〈모욕〉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장학 사업 대신 1만 루블을 그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은 마치 적선을 하겠다고 나선 것처럼 무례하고 경솔했다.

공작은 부르도프스끼를 도와주고 싶어해요. 순수한 마음에서 그에게 따뜻한 우정과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어요

공작, 나는 당신이 가브릴라를 통해 부르도프스끼의 어머니에게 돈을 몰래 보내 준 것을 알아요.

내가 당신의 동료들에게서 들은 말과 방금 당신이 유감없이 들려준 유창한 말을 간추려 본다면, 이 모든 것은 어떤 권리를 찬양하는 것으로 좁혀지는군요.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제외하고, 무엇보다 먼저 그 권리 자체를 연구해 보지도 않고서 말이오.

여러분은 아까 나에게 무신론자라고 얘기했지요? 그런데 자연이란 것은…… 여러분은 왜 또 웃는 겁니까? 지독하게 잔인한 분들이군요!」 그는 사람들을 훑어보며 섭섭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의 자유주의자는, 내가 무수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남들이 상이한 신념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와 신념이 틀린 사람들에게 욕을 한다든가 그보다 더 못된 짓으로 대응을 한다니까요.」

나는 그만큼의 세월 동안 병상에 누워, 그만큼의 세월 동안 이 창밖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그만큼 생각해 왔어요. 죽은 자에게는 나이가 없는 법이에요.

힘의 권리는 호랑이와 악어의 권리, 심지어는 다닐로프와 고르스끼의 권리와 멀지 않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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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백치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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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여자가 너에게 동의를 할 수 있으며, 자기의 사진까지 선사할 수 있는 거냐? 설마 네가 그런…… 그런…… 여자를…….」

「어머니, 이 문제에 푹 빠지셨군요. 또다시 참지 못하시다니. 우리 집에서는 모든 게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시작되어 폭발되곤 하지요. 어머닌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몇 분 후 그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자신이 나온 뒤 대화가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인종을 제때 고치지 못할 만큼 게으르면 사람이 문을 두드릴 때 현관에 앉아 있기라도 할 것이지. 아니 거기다 코트까지 떨어뜨리다니, 팔푼이 같으니라고!」

니나 알렉산드로브나는 〈모든 것에 동의한다〉고 한 자신의 말을 완전히 망각한 채 바르바라 편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나스따시야가 자기 가족에게 조소와 독설을 퍼붓는 데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지, 직접 집으로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의구심과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로 허영심이 많은 가브릴라는, 최근 두 달 동안 약간이라도 자신을 고상하고 귀한 존재처럼 보이게 할 구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기를 두고 〈참을성 없는 거렁뱅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훗날 그 말에 대한 대가를 치러 주겠다고 온갖 맹세를 다 했지만, 만사를 원만하게 해결해야 된다는 공상을 이따금 홀로 해보곤 했다

무얼 위해서, 무얼 얻으려고 내가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가? 차라리 내가 그 부인을 사랑했다면 몰라도, 나는 그저 가벼운 장난으로 뾰뜨르를 곯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서 꽃다발을 가로채지만 않았던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 있을지 누가 압니까

소(小) 뒤마의 『춘희』가 대유행을 해서 상류 사회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내 의견이지만 그 소설은 불후의 명작으로 남을 겁니다. 이 소설을 적어도 한번쯤 읽어 본 지방의 부인들은 그야말로 열광적이다시피 했습니다. 매력적인 소설 내용, 주인공 설정의 독창성, 미묘한 부분까지 묘사된 황홀한 세계, 소설 곳곳에 깔린 이 모든 매혹적 요소들(예를 들어 하얗고 핑크빛 나는 동백꽃 다발을 번갈아 사용하는 배경)[49]은 한마디로 환상적인 디테일이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공작은 일생에서 최초로 내 마음을 맡길 만한, 진정으로 믿을 만한 분이에요. 그분은 첫눈에 나를 믿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대담한 데다 온갖 것을 다 겪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다리야 알렉세예브나와 말이 없으면서도 아름다운 낯선 부인이었다.

마치 파티장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친지들 집에서 그림, 화병, 조각이나 병풍을 잠깐 빌려다 놓는 것처럼 그림을 걸어 두듯 이 여자를 앉혀 두곤 했던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날뛰는 페르디쉬첸꼬가 있었다. 가브릴라는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오직 예빤친 장군 한 사람만이, 방금 자신의 선물을 체면이고 뭐고 상관치 않고 우스꽝스럽게 되돌려 받음으로써 수치를 감수해야 했던 그만이, 예기치 않은 기괴한 사건, 로고진의 출현 같은 일로 기분이 상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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