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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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허술한 경비와 늦장 대책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불법이주민 9명이 사망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의 환대가 아니라 눈물이었다. 그나마도 눈물로서 위안을 받은 고인들은 다행이다. 합동분향소에 찾아 오지 못한 가족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왜 제 나라를 떠나 가족의 소식도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하며 돈을 벌러 나와야 했을까. 우리는 왜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찾아 온 그들에게 멸시의 눈빛과 욕설을 보내야 했을까.

 

 이와 같은 참상을 겪는 것은 <엔리케의 여정>에 등장하는 불법이주민들도 별다르지 않다. 사회와 경제적인 구조 체계가 가난을 생산해내는 나라에서 태어난 그들이라고 해서, 그것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면서 부터 행운을 얻은 아이들에게 마냥 분노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엔리케의 여정>은 탄생했다.

 

 엄마, 라우데스에게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던 벨키와 엔리케는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의 삶을 살아간다. 벨키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편, 엔리케는 엄마와의 이별을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방황한다. 결국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일곱번에 실패 끝에 도착하게 된 엔리케의 여정은 결코 해피엔딩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여전히 수 많은 라우데스가 가족을 떠나 미국을 향하고, 수 많은 엔리케가 엄마를 찾아 뒤따른다. 미국은 착취와 통제로 약소국을 조종하면서 본국의 손해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반응한다. 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하고, 인종차별로 외면하기도 하고, 적은 수당으로 착취하기도 한다.

 

 미국 또한 이러한 구조적 폐해를 바꾸지 않는 바에는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장기적인 투자를 하기에 적합한 긍정적 의욕조차 애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들을 잡아내 돌려 보내면 그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찌 괘씸한 이기주의라 욕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다. 엔리케의 여정은 그렇게 우리의 모순적인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게다가 결코 동화처럼 해피엔딩만 부르짖을 수도 없다. 만약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 내려 했다면, 눈물의 재회 장면으로 끝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22일 동안 고생 끝에 엄마와 재회한 엔리케는 며칠만에야 엄마에 대한 이상향이 실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11년이란 세월은 그들을 진정한 애정으로 묶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말다툼을 하게 되고, 울음에 겨워 서글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변명하기에 바쁘다. 결국 엔리케의 여정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이 오해를 풀어 내고, 진정으로 서로를 위안하려는 날은 아마 제법 먼 후일이 될 것이다.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는 것이다. 그것이 엔리케가 겪은 고난의 여정만큼이나 씁쓸하고 안쓰럽다.

 

 허나, 아직도 이 책이 소설인지 논픽션인지 기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L.A. 타임즈의 기사를 바탕으로 썼다고는 하지만, 모호하기 짝이 없다. 퓰리처상을 보도 부문에서 탄 것인지 문학 부문에서 탄 것인지도 명확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 퓰리처상 홈페이지에 들어가 2003 수상자 명단에서 feature writing 부문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내 착각, 즉 책으로 엮어져 나왔기에 문학의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 오류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번역기를 사용한 듯한 조악한 문장과 잘못된 어조사, 오자와 탈자, 불분명한 수식어들이 거슬려 읽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로 인해 같은 문장,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의 표지나 속지, 도비라 등의 재질이 고급스러운데 비해, 내용물의 질은 부실하여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출판사의 '세심한 배려'의 부재가 필요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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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눈사람
조영훈 지음 / 마음향기(책소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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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색 눈사람 있어. 그래서 아무리 햇볕에 내려쬐어도 안 녹아.

 

 어린 유희는 마찬가지로 어린 친구들에게 말한다. 정화는 그 말에 동조한다. 그리고 초록 눈사람은 마침내 소나무 위에서 빛난다. 유희와 선우의 어린 딸 꽃별의 눈에서 반짝 반짝. 어린 날, 지지 않는 상록수와 같은 색깔을 칠하면, 마찬가지로 녹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유희에게서 탄생한 초록 눈사람이, 다시 빛나는 순간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두 부부가 서로에게 숨기며, 딸 꽃별이를 서로에게 맡길 생각으로 안심한다. 하지만 부부 모두 말기 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이에서 서로의 친구인 정화는 부부 모두에게 비밀을 숨겨 주다가, 마침내 꽃별이를 자신이 맡겠다고 나선다. 꽃별이는 초록 눈사람을 보며 웃는다. 언젠가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믿음을 갖고.

 

 당연히 절망과 두려움의 심리 묘사를 위주로 나갈 줄 알았던 <초록 눈사람>은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병을 받아 들이는, 이해할 수 없는 심리를 선보인다. 잠깐의 절망과 고뇌를 갖고, 후에는 결국 가망 없는 수술과 치료를 거부하고 말미를 서로의 손을 잡고 오도카니 죽음을 기다린다. 더군다나 유희가 먼저 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복선은 너무나 선명해서, 복선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유희의 병을 알게 된 선우가 오열하여도 전혀 놀랍지 않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오히려 병을 담담하게 받아 들인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뇌를 표현하는 것이 부족해 안타깝다.

 

 남은 시간을 가족과의 행복함으로 위장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할 일을, 그리고 앞으로 혼자 남겨질 꽃별에게 홀로서기 준비를 시킬 뿐이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유희의 아픈 가족사도 글 속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겉을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다. 선우와 유희가 재회하는 장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느낌이다. 장편 속에 여러 단편을 우겨 넣은 것처럼 철저히 겉핥기식으로 맴돈다. 그래서 특별한 감동이 없다. 그저 묘한 운명일세,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심리 묘사를 위주로 표현하였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또 단란한 세가족의 일상, 예를 들어 꽃별이를 가정부의 품으로, 또 보육원으로 보내곤 했던 시절의 유희의 후회스러운 지난 날을 유희의 가족사 대신 확대해 보여 주었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듯 하다.

 

 게다가 부부는 살고 싶어하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말미에서 유희가 병의 증세가 심해져 헛소리를 하듯 내뱉는 것 외에는 살고 싶다, 는 말보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할까, 라는 부부의 대화가 중심이다. 도피하듯 말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오히려 살고 싶어, 내가 왜 죽어야 해, 라고 말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아쉬움도 미적지근하게 다가온다. 죽음이 닥쳐 온 사람들이 가진 심리 묘사와 그에 따른 여러 아쉬움들이 무작정 밀려 들어오는 것을 표현하기에 작가의 역량이 너무 작지 않나, 싶다. 조영훈에게는, 각 장면의 적절한 전환을 소설로 빚어 내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일면, 시나리오였다면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속극 극복 공모에 당선하였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 나니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

 

 이럭저럭 아쉬움이 큰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 말만은 공감한다.

 

- 웰빙(well being)이라는 말이 있듯 웰다잉(well dying)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것도 거기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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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가족
권태현 지음 / 문이당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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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끔, 눈물이 났다. 어릴 적 읽었던 김정현의 <아버지>만큼 펑펑 쏟아 낼 눈물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찔끔거리게 되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내 가정 때문에. 평이한 문체와 간혹 어울리지 않는 묘사와 비유가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일단 전체적인 서사가 너무나 씁쓸하게 와닿았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쯔음이었나. 그 때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던 집안에서 나름대로 잘 컸다, 라고 스스로 대견해 하곤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가정의 불화와 날벼락같이 떨어진 빚더미, 우왕좌왕하며 전전했던 월셋방들이 아직도 눈 앞에 선명하다. 지금도 전연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여전히 나는 어리고 약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돌이켜 보고 후회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탓일까. 눈물이 글썽해 졌다.

 어린 날의 치기와 용감무쌍하게 부모에게 대들며 삿대질까지 했던 한심한 꼬마를 기억한다. 아마 부모님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끝내 풀어드리지는 못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면 또 씁쓸하다. 아직까지 죄송하다, 는 말 한마디조차 못 하고 끙끙거리고 있는 내가 답답하기도 하다. 다예와 석진의 삐뚤린 행동과 마음을 읽으며 얼마나 욕을 해댔던지. 하지만 그 시절의 꼬마가 떠올라 비난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송구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아, 답답도 하여라. 다예와 석진의 외침에 오버랩되던 그 꼬마의 울부짖음, 그리고 막연한 불안과 막막한 현실 속에 절망하며 시우에게 비난을 퍼붓는 지은의 눈물에 오버랩되는 어머니, 아무데도 답답함을 토로할 길이 없이 죄책감에 고개 숙인 시우의 절망에 오버랩되는 아버지. 단 한 번도 착한 자식인 적이 없었던 그 꼬마에게 미안해진다. 그리고 안쓰러운 마음에 안아 주고 싶다.

 문득 라는 김윤아의 노래가 떠오른다. 열일곱, 또는 열셋의 나, 상처 투성인 그 앨 안고 다정히 등을 다독이며, 사랑한다 말 하고 싶어. 어쩌면 이제는 그 꼬마를 다독여 가며, 내 잘못을 시인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싶다. 마음 안의 분노도 불안도 그저 내버려 두면 넘쳐 흘러 갈거야. 그럴 거니까. 어쨌든, 덕분에 힘이 났다. 아직 세상의 따뜻함을 맛 보지 못 했으니까, 앞으로 겪어 갈 인생은 아름답지 않을까. 내가 하기에 달렸을 거라, 믿고 싶다. 인생의 굴곡이란 말을 벌써 써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인생의 굴곡이지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이 굴곡은 언젠가 다시 올라갈 때가 있다는 말이다. 시우가 결정내린 것 처럼 그 굴곡이 갑자기 낭떠러지가 되었다고 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결국 시우는 병원에서 눈을 떴지만, 그리고 그 선택 덕분에 가족의 마음이 돌아 섰지만, 꼭 그런 식으로 했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양귀자의 말처럼, 이 소설에서 기교는 도리어 가식이 된다. 어쩌면, 가식없이 핵심을 뚫은 정공법이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진짜 삶이다. 기교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삶을, 나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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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노래
덴카와 아야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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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시간을, 가족과 친구와 지낼 시간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노래할 시간을.

 

 삶도 죽음도 제대로 노래하지 못했지만, 그 가벼운 문체 속에서 웅장한 울림이 있었다. 드라마도 영화도 보지 못했는데, 원작 소설이라는 것을 잡으며 이것이 과연 원작일까, 라는 의문이 일었던 것 같다. 마치 한 편의 시나리오처럼, 짤막짤막 감동할 여운도 남겨주지 않은 채 지나가는 서사가 참 안타까웠다. 게다가 주인공인 가오루는 자신의 병에 대한 절망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영화에서는 좀 더 깊은 여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나, 밤이 아니면 갈 수 없어. 라고 말하던 가오루의 눈망울이 마치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누구보다 태양의 소중함을 알고, 태양을 사랑하지만 태양을 볼 수 없는 가오루. 하지만 그 소중함을 깨달은 것은 결국 태양을 잃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 혹은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기에 더욱 안타까움이 스친다. 마치 산소처럼 언제나 곁에 있기에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이 주위에는 많다. 그것을 잃고 나서야 진정으로 그것에 대한 가치와 사랑이 샘솟아 나지 않던가. 나 또한 그런 것이 있기에.

 

 하지만 가오루는 행복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자신을 응원해 주는 단 하나의 친구와 연인. 가오루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이기에,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애틋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하지만, 생각해 본다. 태양 아래에서 만날 수 없는 그 무한한 서러움을. 밤하늘을 보고 밤공기를 마시고 밤에 눈을 뜨고 있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가오루의 서글픔.

 

 자신의 CD와 아버지가 물려 준 깁슨 기타, 그리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꿈만 꾸고, 좋은 생각만 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을 믿고 싶다.

 

- 태양이 지면 만나러 갈게.

 

 일본 특유의 서사 위주, 가벼운 문체 속에서 특별한 깨달음이나 애달픔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노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세상을 꿈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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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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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프랜차이즈와 세계권력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이 시원하고 통쾌하게, 또 장렬하게 그것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추어는 이미 숨을 거둔 이 세상에서, 어설픈 프로가 되기를 거부한 이들에게 휘날리는 훈장을 달아준 느낌이다. <카스테라>에서도 말했듯이 이 세상의 일원이 되지 않고도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늘 이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 지는 듯 하다.

 

 아마추어에게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다. 부유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지층 속에 각자가 묻힌 지층에서 오늘도 화석처럼 잠들어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비참해진다. 그리고 그 비참함은 위대하기까지 하다. 개미처럼 빠득빠득 이를 갈며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고, 혹은 그 차선만을 달리며 연료가 다 떨어져도 기어 가는 사람들. 말 그대로 그것은 기어가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기어 가는 개미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치기도 한다. '왜 이렇게 달려야 하지?'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혹은 듣게 되어도 무시해 버린다. 무안해진 개미는 다시 엎드려 기어 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란, 그런 곳이다.

 

 사실 야구라고는 야구의 야자도 모르며, 사구니 안타니 피안타니 하는 것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홈런 정도일까. 그것은 타스포츠도 마찬가지라서,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다 읽고 나서도 1할 2푼 5리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도 모르겠다. 보통 앞뒷말로 추정이 가능할 법한데, 이건 영 스포츠는 맹맹해서 알 수가 없다. 실은 인터넷 같은 것을 찾고 싶지도 않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야구라면 스포츠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종이다. 어쨌든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어린 시절의 야구는 아버지가 TV 채널을 독점하게 만드는 나쁜 놈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삼미슈퍼스타즈가 결성은 커녕 해체한 뒤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어쨌든 그 부분은 스리슬쩍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도록 하자. 5공이 만들어 낸 '섹스, 스포츠, 스크린', 즉 3S정책 시절의 프로스포츠, 야구. 우민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아마 현재 아이돌 S그룹 팬클럽 정도는 되었겠지, 라고 어설프게 짐작이나 해 볼 따름이다. 게다가 슈퍼맨 로고라니, 생면부지인 나로서도 웃음이 절로 난다. 구단명도 일부러 그렇게 지은 것 마냥 아이러니다. 게다가 말미에서 조성훈이 삼미에 대해 읊는 장면은 압권이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나름 진실한 대사가 절절하다. 킥킥대다가 결국은 감동하게 된다. 정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창단하게 되고, 엉망진창이지만 전지훈련도 갔다 온다. 그야말로 쾌활하다.

 

 느림의 미학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처럼 평온해 보인다. 온화하고, 부러워 진다. 거침없이 달려 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 봤을 때, 느긋이 흔들의자에 앉아 낮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 처럼 화가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묘한 기분이다. 아, 쉬고 싶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또 절대 쉴 수는 없을 것 같은 빡빡하고 거침없는 세상.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빈둥대면, 걸림돌이 되어 걷어 차일 것 같은 세상. 마치 코카콜라 공장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정신이 없다. 코카콜라가 쏟아져 나오는 기계 입구를 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까, 마구 케찹을 뿌려 댄 맥도날드 햄버거를 하나 하나 분해하여, 맥할배 얼굴에 쳐바르고 싶은 심정이다. 오, 맙소사. 그러니까 나는, 그 치열함과 프랜차이즈 간판 아래에 짓눌린 소시민이기에 눈물이 절로 났다, 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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