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눈사람
조영훈 지음 / 마음향기(책소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 초록색 눈사람 있어. 그래서 아무리 햇볕에 내려쬐어도 안 녹아.

 

 어린 유희는 마찬가지로 어린 친구들에게 말한다. 정화는 그 말에 동조한다. 그리고 초록 눈사람은 마침내 소나무 위에서 빛난다. 유희와 선우의 어린 딸 꽃별의 눈에서 반짝 반짝. 어린 날, 지지 않는 상록수와 같은 색깔을 칠하면, 마찬가지로 녹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유희에게서 탄생한 초록 눈사람이, 다시 빛나는 순간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두 부부가 서로에게 숨기며, 딸 꽃별이를 서로에게 맡길 생각으로 안심한다. 하지만 부부 모두 말기 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이에서 서로의 친구인 정화는 부부 모두에게 비밀을 숨겨 주다가, 마침내 꽃별이를 자신이 맡겠다고 나선다. 꽃별이는 초록 눈사람을 보며 웃는다. 언젠가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믿음을 갖고.

 

 당연히 절망과 두려움의 심리 묘사를 위주로 나갈 줄 알았던 <초록 눈사람>은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병을 받아 들이는, 이해할 수 없는 심리를 선보인다. 잠깐의 절망과 고뇌를 갖고, 후에는 결국 가망 없는 수술과 치료를 거부하고 말미를 서로의 손을 잡고 오도카니 죽음을 기다린다. 더군다나 유희가 먼저 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복선은 너무나 선명해서, 복선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유희의 병을 알게 된 선우가 오열하여도 전혀 놀랍지 않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오히려 병을 담담하게 받아 들인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뇌를 표현하는 것이 부족해 안타깝다.

 

 남은 시간을 가족과의 행복함으로 위장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할 일을, 그리고 앞으로 혼자 남겨질 꽃별에게 홀로서기 준비를 시킬 뿐이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유희의 아픈 가족사도 글 속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겉을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다. 선우와 유희가 재회하는 장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느낌이다. 장편 속에 여러 단편을 우겨 넣은 것처럼 철저히 겉핥기식으로 맴돈다. 그래서 특별한 감동이 없다. 그저 묘한 운명일세,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심리 묘사를 위주로 표현하였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또 단란한 세가족의 일상, 예를 들어 꽃별이를 가정부의 품으로, 또 보육원으로 보내곤 했던 시절의 유희의 후회스러운 지난 날을 유희의 가족사 대신 확대해 보여 주었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듯 하다.

 

 게다가 부부는 살고 싶어하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말미에서 유희가 병의 증세가 심해져 헛소리를 하듯 내뱉는 것 외에는 살고 싶다, 는 말보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할까, 라는 부부의 대화가 중심이다. 도피하듯 말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오히려 살고 싶어, 내가 왜 죽어야 해, 라고 말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아쉬움도 미적지근하게 다가온다. 죽음이 닥쳐 온 사람들이 가진 심리 묘사와 그에 따른 여러 아쉬움들이 무작정 밀려 들어오는 것을 표현하기에 작가의 역량이 너무 작지 않나, 싶다. 조영훈에게는, 각 장면의 적절한 전환을 소설로 빚어 내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일면, 시나리오였다면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속극 극복 공모에 당선하였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 나니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

 

 이럭저럭 아쉬움이 큰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 말만은 공감한다.

 

- 웰빙(well being)이라는 말이 있듯 웰다잉(well dying)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것도 거기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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