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8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재준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칸트의 미학. 솔직히 말해 이 책은 지금 시절에 맞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런 나의 견해에 대해, 미학이라는 것 자체가 진부하다거나 그것의 주관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으로 본다면, 정확한 판단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혹하게 하는 것에 대한 가치와 미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비난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다.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지성과 감성에 대한 무게에 차별을 두고 싶은 게 아니라, 그의 미학이 현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칸트는 숭고함이란 감동시키는 것을 말하며, 아름다움이란 매료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숭고한 성질은 존경을 환기시키고, 아름다운 성질은 사랑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더불어 '인간 본성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의 보편적인 근거로서 그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허나 그 감정이 절대적이며, 보편성이 아니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전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감이 든다. 어째서 성별(性別)에 따라, 민족에 따라, 인종에 따라 그것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화가 났던 여성의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은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것을 가장할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더욱 지적이며, 더욱 숭고하다는 것을 전제로 이러한 감정을 논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 유럽 각국의 민족적 특성을 통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알아 본 것 역시 의아하다. 어느 정도 각 민족의 특성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을 테지만, 갈수록 세계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그것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뒤떨어질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764년이다. 칸트가 그 시대의 '심오한 지성'이었다고는 하나, 또 이러한 심미적인 감정이 이론과 일상의 내용에서 유리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이것을 변명의 여지로 남길 수 있을까. 물론 18세기에는 칸트뿐 아니라 많은 이론가 사이에서 유행했던 이런 미학체계는 시대적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입각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로서는 그들이 미숙한 경험의 한계점에 부딪힌 것으로 밖에 여길 수가 없다.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정언명령이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자유의지가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하던 칸트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게다가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선의지가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인간 감정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또한 자연적으로 본성에 내재해 있으며, 단지 계발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대상이 더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이성과 감성의 종합을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

 

 칸트는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내리는 미적 정의, 즉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은 칸트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고, 그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숭고한가 지적인가를 들고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발언을 남발하며, 또한 여성이 지적이려 시도하는 것이 몹시 추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분노까지 할 정도였다.

 

 미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그것에 발맞춰 나가는 사회 속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는 전제를 바로 세워야 한다. 칸트는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그는 미학에 관한 자신의 주관적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 분류화, 일반화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젊은 칸트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더불어 그 또한 18세기의 사람으로써 당시 미학 이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내 스스로의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론은 물론 대개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축적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와 더불어 비판은 그 이론의 비논리를 짚어 가며 발전하는데 앞장선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의 근원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칸트 미학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자위하련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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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011-04-19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칸트의 미학을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지만, 님의 견해는 틀렸습니다. 칸트는 취미 판단이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참고로 미학과 졸업생입니다.

Lomain 2017-12-2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칸트의 다른 비판서가 쓰여지기도 전인 초기 저작입니다. 그의 미학 관점을 좀 더 세밀하게 알기 위해서는 <판단력 비판>이라는 저작을 보셔야 원하는 도움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