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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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팔을 휘젓는다고 안개가 걷히지 않듯, 내가 아무리 조바심을 내어도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137쪽)

 

 <슬롯>에서 딱 한 문장을 내세우자면, 미래의 불확정성에 대한 이 문장이다. 신경진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쓴 것이 그것이라고 말하듯 말이다. 그렇기에 언뜻보면, 카지노에 대한 이야기는 얼렁뚱땅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눈여겨 보면 카지노라는 소재는 확실히 그럴듯 하다. 그래도 역시 '도박과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못박는 것은 의아하다.

 

 어쨌든 그가 선택한 카지노라는 배경은 그 자체에 아이러니와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씁쓸하다.

 

- 카지노는 논리나 이성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 곳은 '무작위'의 태양이 군주였고, 양분은 오로지 그에게 선택받은 자에게만 주어졌다. (151쪽)

 

- 어쩌면 도박의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동전의 앞면이 나오든 뒷면이 나오든 결국 같은 것이다. 그럼 정말 세계가 예정된 것이라는 말인가? 내가 발버둥을 친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런 수고를 해야 되는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211쪽)

 

 이렇게 카지노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윤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로 도박에 대한 상념을 이야기해도, 기훈처럼 고양이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부르주아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훈이 '고양이가 죽었다면 새 고양이를 사면 그만이다' 라고 말할 때, 소름이 돋았다. 그와 같은 무리에게는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노려야 할 절실함도 돈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이나 분노도 없다. 그들에게 인생은 도박이다.

 

 하지만 '나'는 소시민이다.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겁도 많고 게으름도 많다. 그저 물 흐르듯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길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분명, 매력있는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소시민은 분명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는 중산층을 대표하는 평면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어설픈 소지식인임에도 분명하다. 그는 여러 인용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 하지만, 수진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마치 생각은 상실되어 있고, 인용구만이 전부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력 하는 시도가 헛됨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나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147쪽)

 

- 그래도 '만약'이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꺾지는 않았다. 생존이란 그런 거라고 교육받았고, 설령 교육받지 않았더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본능에 따라 삶을 유지한다. (211쪽)

 

 게다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하릴없이 살아가는 탓에 신선함을 잃어버린 듯 하다. 제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도 않는다. 삶의 권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탓이라기보다 스스로의 탓이며, 또한 세상의 탓이다. 그렇기에 더욱 안타깝기 짝이 없다. 희망도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베수비어스의 언덕에 도시를 지을 수 있을까.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하지 못한 것, 자신에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것을 타인에게 명령함으로써 그 안타까움을 더욱 자아낸다. 그렇기에 도박과 여자, 라는 뻔한 이야기 속에 흐물흐물한 세상을 담아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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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대 화성인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김옥희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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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의도대로 <존 레논 대 화성인>은 그로테스크했다. 파격적이고, 포르노그라피적이다.

 

 이 책을 펼쳐 들기 전, 왜 제목에 존 레논과 화성인이 들어가는 것일까, 하고 고민했다. 존 레논과 요코를 가르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자, 도대체 왜 제목이 <존 레논 대 화성인>인 거야!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자 MBE훈장을 반납했다는 것 때문에 존 레논이라는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 후였다.

 

 이 책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폭력적인 것이 사악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레논 대 화성인>이라는 점은 꽤 그로테스크하지만, 어울리는 셈이다. 존 레논은 평화의 수호자, 화성인은 평화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어울린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중 '멋진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파괴자, 즉 화성인에 의해 상처받은 이들의 대표격이다. 주인공 '나'는 '멋진 일본의 전쟁'의 신병인수를 맡는다. 그리고 파파게노, 테이텀 오닐, 이시노 마코와 함께 그를 치료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신병인수를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를 받아 들이고 친구들과 함께 그를 치료하는 데, 이것의 이유는 단순하다. '멋진 일본의 전쟁'은 과격파 시대의 희생물이며, 그를 돕는 이들은 과격파 시대를 피해 살아남는 자들이 가지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시노 마코가 '자본론 할아버지'가 발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다.

 

 존 레논의 노래 <Imagine>처럼, 그들은 평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제 과격파 시대가 묻는 정의 따위는 내버려 두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체 따위는 지워버리고, 진정한 평화를 꿈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가 쓰고 있는 포르노그라피의 생명이 길어야 2-30년밖에 남지 않았듯 진정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생명이 2-30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진정 '리얼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난 세기의 우리는 분명 성급했으며, 평화를 위한 폭력이 허락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조금 다르다. 목적이 평화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수단, 즉 폭력을 사용하여 얻는 평화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단의 모순으로 이루어진 목적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알고 있다. 이것이 지난 세기의 우리가 얻은 유일한 깨달음이라도 좋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 세기의 모순을 딛고 다음 세기에 좀 더 진정한 것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자본론 할아버지'가 이시노 마코에 의해 발기에 성공하고, '멋진 일본의 전쟁'이 테이텀 오닐에 의해 섹스에 성공했듯이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의 의해 우리가 치유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멋진 일본의 전쟁'은 죽었다. 그의 시체 앞에서 그와의 관계를 묻는 이들에게 '나'와 친구들은 할 말이 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멋진 일본의 전쟁'은 치유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체를 끝내 몰아내지 못한 것일까. 결국 그들의 정신적 외상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치 않다.

 

- 야옹 야옹 빨리 죽어버려 죽음이란 재미있는 거야 고양이도 인간도 죽는다 즐겁군 사실은 나도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척하거나 열심히 사는 척하고 있으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 없이 만사쾌조.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단지 이렇게 끝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가 응원하는 쪽이 존 레논인지 화성인인지 분명히 구별하기란 어렵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는 분명 평화를 응원하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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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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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부대, 허나 이 300명의 전사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들은 '스파르타인'이다. 이 말 한마디로 스파르타인의 대한 이미지는 기존의 것과 합해져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펼쳐보기도 힘들 정도의 거대한 판형인 이 만화책은 스파르타인이 등장한다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피를 뿌릴 것으로 예상되었고, 실제로 그것은 적중했다.

 

 스파르타식 학원, 이라는 간판이 즐비하던 90년대 학원가를 상상하면 쉽게 그 엄격함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약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그들의 방식은 마치 맹수를 연상케 한다. 사자는 제 자식을 물어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살아 돌아오길 기다린다지 않던가. 물론 이것은 그저 과장에 불과하며, 초원에 사는 사자가 절벽을 만날 일은 전무하다. 어쨌든 그러한 맹수에 비견될 정도로 강하게 키워지고, 양성된 전사의 무리가 바로 스파르타인인 것이다.

 

 한 번 전투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는다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있었기에 스파르타가 한 때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현대에 들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죽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스파르타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지배족은 이주민으로,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피지배족인 선주민을 억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식할 정도로 지독한 훈련을 통해 전사로 키워지고, 지배계급인 귀족의 직업은 오로지 전사였으며, 전사가 아닌 농경이나 상업에 종사한 이들은 피지배족, 즉 노예였다고 한다.

 

 이러한 스파르타인에게 3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그야말로 평범한 부대가 아니었다.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내용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300명이라는 소수의 부대를 본 타국에서 항의를 하는 것이 그 장면이다. 그러자 왕, 레오니다스는 가소롭다는 듯 묻는다. 저기 있는 자네의 직업은 무엇인가? 조각가, 대장장이, 빵장수 등 실로 그들의 직업은 가지각색이다. 대답을 들은 왕은 말한다. 스파르타여, 그대들의 직업이 무엇인가?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은 대답 대신, 창과 방패를 치켜든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전사였던 것이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이들. 왕비조차 말하지 않던가. 스파르타이시여! 방패를 잃느니 그 위에 누워 돌아오세요.

 

 생명을 경시하는 듯한 그들의 풍조에 내심 잔인함과 공포를 느끼지만, 그 시대의 풍조를 마냥 탓할 수 만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철저히 군사중심적인 사회에서 커온 그들의 가치관은 전투에서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이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300명이라는 군대가 정말 소규모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페르시아의 군대와 맞선다면 매우 부족하지만, 스파르타의 인구는 7-8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3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적절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국 내통자에 의해 이 부대는 전멸하게 되지만, 스파르타가 3일간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그리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치게 된다. <300>에서는 기형아로 버려질 뻔 했던 에피알테스가 산을 넘는 우회로를 가르쳐 준 덕분에 전원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마치 하나의 작은 무덤처럼 방패로 온통 덮어 창만 내밀어 싸우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레오니다스는 결국 페르시아의 군대에 무릎 꿇지 않았고, 그것은 죽음으로 대체된다.

 

 이제 지휘관 딜리오스가 풀어놓는 최고의 이야기는 이제 '소년과 늑대 이야기'가 아니라 '뜨거운 문 이야기' 이다.

 

- 이 곳을 지나는 자유인은 들어라. 언제까지나 영원히…. 세월이 깃든 바위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그대에게 속삭일지니. 스파르타에 전하라, 지나는 이여. 스파르타의 법에 따라 여기, 우리가 누워 있다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하다. 그리고 안타깝다. 도대체 누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그것이 페르시아인인가, 스파르타인 그 자신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대인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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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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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트 보네거트 이 소설, <제5 도살장>에서 분열증 환자인 빌리의 입을 빌려,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말한다. 그는 때때로 꿈에서 깨어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트랄파마도어에 갔다 왔다며, '그렇게 가는 거지'를 외치는 그의 정신은 미쳤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익살로 인해 당시의 참상이 더욱 잔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말처럼, 비현실적인 이 이야기를 사실적인 표현 방식으로 전달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랐으리라. 그렇기에 비이성적인 말로 설명한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시간여행만 할 줄 안다면, 죽음도 죽음이 아니기에, 그는 죽음에 대해 가볍고도 장중하게 읊조린다. '그렇게 가는 거지.' 라고. 드레스덴의 참상이나 검안사 빌리를 잊어버릴지라도 이 한마디만은 절대 잊지 못하리라. 아마, 이 책을 읽어 본 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이 의문에 대해 속시원히 대답해 줄 이가 있을까. 빌리의 입을 빌려 말하는 커트 보네거트 또한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의문점에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전쟁은 언제나 대의만 있고, 대안은 없다. 대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그 희생의 대안은 애당초 마련되어 있지 않다.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 남는 빌리가 그 상황에서 살아 남은 것을 전혀 기뻐할 수 없었던 것 처럼 말이다. 그들이 죽음과 추었던 의무적인 춤을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의무는 있었으나 권리는 없었다.

 

- 알다시피, 우리는 여기 있으면서 전쟁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야했네. 그래서 전쟁을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치르고 있다고 상상했지.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아이들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면도를 하고 난 얼굴들을 보았을 때, 그건 충격이었네. 나는 혼자 이렇게 말했지. '하느님 맙소사. 이건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야.'

 

- 극장 가까이 가자 영국군 포로 하나가 군화 굽으로 땅에 홈을 내고 있었다. 미군 구역과 영국군 구역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빌리와 라자로와 더비는 그 선의 의미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상징이었으니까.

 

- 그가 껴안고 있는 것은 희박한 공기와 석탄재 뿐이었다. 그의 군화는 누가 가져가 버렸다. 그의 발은 푸르뎅뎅했다. 그가 죽었든 말든, 세상은 그런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전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생각하고 피력해 볼 새도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아이들은 선의 상직적 의미와, 세상은 누군가의 죽음과 눈꼽만치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겪으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의지가 그것을 원했듯 원하지 않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렇기에 커트 보네거트는 아들에게 말한다.

 

-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 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과는 반대로 행복한 시간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악몽으로만 치부하고 남겨 두기에는 그 슬픔과 통렬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시간여행을 통해, 전쟁을 돌아 볼 수 밖에 없다. 그의 정신은 차차 분열되어 그 속에서만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비극을 경험하고서도 대의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인류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네 목숨이나 그렇게 보내 버려. 병신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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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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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 데 없이 잔인한 결말이라니. 마지막 장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리라. 이 얇은 한 권의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기에 더욱 그렇다. 종국에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책에서는 '나는 타자다'라는 랭보의 말과, '타자는 곧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온다. 이 말은 곧 내 자신이 지옥이라는 의미이다. 한 켠에 자리잡은 죄의식은 곧 내부의 적이며, 그 적의 화장법은 이루 말할 데 없이 치밀하다. 허나 그 치밀함은 결국 스스로의 무방비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무섭기 짝이 없다. 어디선가 닥쳐 올지 모를 적을 맞이하는 것 보다, 내 삶에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무언가가 나의 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온전히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파괴되지 않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비양심적인 것일까.

 

 - 자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네.

 

 모르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무시하고 살아 온 내게, 누군가 이렇게 말을 건네어 온다면 당혹감이 먼저 찾아 올까. 두려움이 먼저 찾아 올까. 나의 경우,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더 걸맞을 것이다.

 

- 강간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꺼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말이오. 

 

 게다가 그 치는 당연한 듯이 이런 말을 던질 수 있는 비상식적인 인물이다. 도대체 강간을 저따위로 풀이할 수 있다니, 그 잘난 혀를 뽑아 발로 밟아 치대어 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갖은 철학적 논리를 삼류로 저하시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당위성이라는 말로 이해시키려 해도 들어 맞지 않는다. 당위성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이유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위성을 무시해도 될 만큼 대단한 존재가 있을까. 신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멜리 노통브는 이렇게 <적의 화장법>에서 독자를 끊임없이 몰아 치며, 수 많은 경악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매번 증오스러워, 분노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사그라들게 할 수 없다는 데에 특이함을 둔다. 게다가 <적의 화장법>의 결말은 경악과 분노를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문제, 즉 죄의식을 토로함과 동시에 사죄의 길을 막아 버린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궁에 들어선 듯 답답하고, 두렵다. 결코 적과 소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9년 3월 24일 밝혀진 사건의 전말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더욱 큰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진정, 탈출구는 없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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