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대 화성인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김옥희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그의 의도대로 <존 레논 대 화성인>은 그로테스크했다. 파격적이고, 포르노그라피적이다.

 

 이 책을 펼쳐 들기 전, 왜 제목에 존 레논과 화성인이 들어가는 것일까, 하고 고민했다. 존 레논과 요코를 가르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자, 도대체 왜 제목이 <존 레논 대 화성인>인 거야!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자 MBE훈장을 반납했다는 것 때문에 존 레논이라는 이름이 제목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 후였다.

 

 이 책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폭력적인 것이 사악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레논 대 화성인>이라는 점은 꽤 그로테스크하지만, 어울리는 셈이다. 존 레논은 평화의 수호자, 화성인은 평화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어울린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중 '멋진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파괴자, 즉 화성인에 의해 상처받은 이들의 대표격이다. 주인공 '나'는 '멋진 일본의 전쟁'의 신병인수를 맡는다. 그리고 파파게노, 테이텀 오닐, 이시노 마코와 함께 그를 치료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신병인수를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를 받아 들이고 친구들과 함께 그를 치료하는 데, 이것의 이유는 단순하다. '멋진 일본의 전쟁'은 과격파 시대의 희생물이며, 그를 돕는 이들은 과격파 시대를 피해 살아남는 자들이 가지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시노 마코가 '자본론 할아버지'가 발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다.

 

 존 레논의 노래 <Imagine>처럼, 그들은 평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제 과격파 시대가 묻는 정의 따위는 내버려 두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체 따위는 지워버리고, 진정한 평화를 꿈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가 쓰고 있는 포르노그라피의 생명이 길어야 2-30년밖에 남지 않았듯 진정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생명이 2-30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진정 '리얼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난 세기의 우리는 분명 성급했으며, 평화를 위한 폭력이 허락될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조금 다르다. 목적이 평화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수단, 즉 폭력을 사용하여 얻는 평화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단의 모순으로 이루어진 목적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알고 있다. 이것이 지난 세기의 우리가 얻은 유일한 깨달음이라도 좋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 세기의 모순을 딛고 다음 세기에 좀 더 진정한 것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자본론 할아버지'가 이시노 마코에 의해 발기에 성공하고, '멋진 일본의 전쟁'이 테이텀 오닐에 의해 섹스에 성공했듯이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의 의해 우리가 치유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멋진 일본의 전쟁'은 죽었다. 그의 시체 앞에서 그와의 관계를 묻는 이들에게 '나'와 친구들은 할 말이 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멋진 일본의 전쟁'은 치유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체를 끝내 몰아내지 못한 것일까. 결국 그들의 정신적 외상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치 않다.

 

- 야옹 야옹 빨리 죽어버려 죽음이란 재미있는 거야 고양이도 인간도 죽는다 즐겁군 사실은 나도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척하거나 열심히 사는 척하고 있으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 없이 만사쾌조.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단지 이렇게 끝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가 응원하는 쪽이 존 레논인지 화성인인지 분명히 구별하기란 어렵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독자는 분명 평화를 응원하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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