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 데 없이 잔인한 결말이라니. 마지막 장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리라. 이 얇은 한 권의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기에 더욱 그렇다. 종국에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책에서는 '나는 타자다'라는 랭보의 말과, '타자는 곧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온다. 이 말은 곧 내 자신이 지옥이라는 의미이다. 한 켠에 자리잡은 죄의식은 곧 내부의 적이며, 그 적의 화장법은 이루 말할 데 없이 치밀하다. 허나 그 치밀함은 결국 스스로의 무방비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무섭기 짝이 없다. 어디선가 닥쳐 올지 모를 적을 맞이하는 것 보다, 내 삶에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무언가가 나의 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면 온전히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파괴되지 않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비양심적인 것일까.

 

 - 자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네.

 

 모르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무시하고 살아 온 내게, 누군가 이렇게 말을 건네어 온다면 당혹감이 먼저 찾아 올까. 두려움이 먼저 찾아 올까. 나의 경우,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더 걸맞을 것이다.

 

- 강간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꺼이 법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말이오. 

 

 게다가 그 치는 당연한 듯이 이런 말을 던질 수 있는 비상식적인 인물이다. 도대체 강간을 저따위로 풀이할 수 있다니, 그 잘난 혀를 뽑아 발로 밟아 치대어 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갖은 철학적 논리를 삼류로 저하시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당위성이라는 말로 이해시키려 해도 들어 맞지 않는다. 당위성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이유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위성을 무시해도 될 만큼 대단한 존재가 있을까. 신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멜리 노통브는 이렇게 <적의 화장법>에서 독자를 끊임없이 몰아 치며, 수 많은 경악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매번 증오스러워, 분노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사그라들게 할 수 없다는 데에 특이함을 둔다. 게다가 <적의 화장법>의 결말은 경악과 분노를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문제, 즉 죄의식을 토로함과 동시에 사죄의 길을 막아 버린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궁에 들어선 듯 답답하고, 두렵다. 결코 적과 소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9년 3월 24일 밝혀진 사건의 전말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더욱 큰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진정, 탈출구는 없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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