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 1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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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적 판타지, 라고 칭해도 좋겠다. <반야>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느낌이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 동학의 이념, 홍건적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끌어 당긴 느낌은 역력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이것은 분명 판타지, 내지는 무협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제 넘겠지만, 장르 소설을 천 권도 넘게 읽은 나로서는 그리 단언할 수 밖에 없다. 단, 무협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기에, 그 점에서는 약간 다르다. 어쨌든 그렇기에 이 책을 [한국소설일반]이라는 분류에 넣은 것은 갸우뚱하다.

 

 각설하고, 일단 이 소설은 흡인력이 좋다. 한 번 읽게 되면, 손을 놓기가 아쉬웠으니까. 하지만 거리낌이 느껴지는 부분은 곳곳에서 등장한다. 특히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성애 장면은 낯뜨거운 것은 아닌데,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또야?' 이럴 정도이다.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표현한 듯 뜻밖의 장면과 뜻밖의 상황에, 내심 놀라게 된다. 그리고 반야는 은어로 말하자면, 먼치킨이다. (먼치킨이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난장이 족의 이름인데, 근래에 들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여 지나치게 초인적이고 완벽한 소설적 인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가 겪는 시련이나 천민이라는 계급 등은 그의 초인성을 드러내려는 부수적인 요소로 보일 정도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반야는 물론이고 사신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신계에서 칠요라는, 매우 높은 위치를 맡게 된 것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정사실이었다는 것도 의아하다. 게다가 어릴 때 부터 그를 사모하던 동마로는 마치 사신계를 알리기 위한 부수적인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반야가 칠요라는 자리에 오른 뒤,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마로가 사신계를 등장시키기 위한 복선이었다는 것은 제 아무리 눈치없는 독자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죽음 또한 너무 비정상적이다. 유을해가 자살하자 따라 죽는다는 것은, 그가 반야를 사모하는 정에 반하는 행동이 아닌가.

 

 가장 의아한 것은 전생의 업으로 인해, 반야에게 닥친 모든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에게 다가온 옛 인연은 모두 악연이다. 단 하나의 좋은 인연도 만들지 못한 사람이란 없을진대, 그에 따른 인연은 등장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과 개연성이 부족한 스토리, 앞 뒤가 맞지 않는 정황 등은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한가지 더 짚어 보자면, 동학에서 따온 듯한 사신계의 이념 또한 칠요라는 높은 위치를 차지한 반야 스스로가 어기고 있지 않던가.

 

 분명 각종 아이템은 흥미롭기 짝이 없고, 문체 또한 가독성이 좋아 즐거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개연성이 부족한 플롯과 주제의식의 부재가 안타까운 마음은 지울 수가 없으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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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1 - 진옥섭의 예인명인
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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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아마 그들의 삶 자체가 한이오, 그 한을 담은 놀음에서 한 세상 잘 놀다 가는 것이 말만큼 쉽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제 세월 속에 풍화되어 사라져 가고 있는 옛 멋을 글과 사진으로 옮겨 놓은 책인만큼, 그 무게가 더하는 것이다.

 

 예기, 광대, 무당 등 남녀노소에게 손가락질과 반말을 듣던 그들. 천대받으며 살던 시절이 부끄러워, 뿔뿔이 흩어지고야 말았지만 마침내 책으로나마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일게다. 순탄치 않은 우리네 역사 속에서 그들은 산 증인이며, 세월의 흐름을 간직하는 증거다.

 

 특히 해어화, 즉 '말을 알아 듣는 꽃'이라 불리우는 예기, 강신받기 두려워 목숨을 내버릴 정도로 괴로움을 감당해야 했던 무당의 생들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양반가에서는 치욕이라 하여, 내치는 것도 모자라 차라리 죽음을 강요했다고들 하지 않던가. 자식 새끼 먹여 살리느라 갖은 모욕을 감수하며 그 길로 들어서야 했던, 또 그 길 외에는 삶이 아니라 여겨 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날카로운 눈빛은 참으로 서러웠을 게다.

 

 한 때는 세상을 풍미했던 한량들도, 어려운 시절 모르는 듯 인력거에 모셔져 가던 예기도 모두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이들이 있었던가, 혹은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아쉬움이 섞인 물음인지도 모른다. 소리에 미쳐, 춤에 미쳐, 최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희생한 시간을 몰라주는 것도 그들에게는 서러우리라.

 

 노름마치, 놀음을 마친다는 말이 왜 최고의 예인에게 주어지는 존칭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 했다. 한 번 나와서 놀음을 하면, 그 뒤로는 어떤 놀음도 무의미하다 하여 놀음을 마치게 하는 존재라는 것, 그것은 정말 단어 자체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때로는 자신의 재능을 '못된 소질'이라 하기도 하고, '흥'이라 하기도 하고, '전부'라 하기도 하며, 일생을 바쳤던 그들. 한많은 세월, 몰래 몰래 기다리다 세상을 뜬 고인들도 안타깝고, 그나마 문화재로 지정되어 끼니 걱정하지 않고 예능을 하는 이들도 안타깝기는 매 한가지다. 또 어떤 이들은 제자가 없어, 얼마 남지 않은 목숨 걱정보다, 그 후로 끊어질 춤사위 하나, 노랫가락 하나를 더 안타까워 한다. 순탄치 않은 우리 역사만큼, 순탄치 않은 그들의 생을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한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한다. 허나, 그러한 서러움이 있었기에, 예능으로 풀어 헤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한에 겹든, 흥에 겹든, 그들이 우리의 유산이며, 예인이라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낭당 뻐꾸기새에게, 어이 그리 슬피 우느냐 묻는 그들의 한을, 기억하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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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심득
위단 지음, 임동석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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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란 사서삼경 중 하나로 공자어록이라 칭할 수 있다. 나로서는 실용한문 강의 때 듣던 내용이 다수 나와,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공자라는 군자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위단의 논어심득은 천지인의 길, 마음의 길, 처세의 길, 군자의 길, 교우의 길, 이상의 길, 인생의 길이라는 총 일곱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중 인생의 길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 공자가 말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를 배워 위로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이 하늘이던가!" (180쪽)

 

 인력을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리라, 는 동양 명언이 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음을 원망 말고, 제 할 일을 다 하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이 할 일을 다 하였다면 그럴 일 또한 없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위단은 논어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온천이라고 칭한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그릇된 행동을 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알고, 또 그 부분을 치유할 힘을 스스로 얻도록 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논어를 체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말이다. 허나, 잠깐 마음의 휴식을 찾고, 옛 구절의 새로움을 되새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책이 소임을 다 하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 공자가 말했다. "인자한 사람은 근심이 없고, 지혜로운 사람은 의혹됨이 없으며,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50쪽)

 

 옛 시대의 군자가 지금의 군자의 모습과 다를 것은 없다. 다만, 좀 더 세분화된 사회에서 변한 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언제나 옳고 그름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정의를 가지고, 관용할 줄 알며, 지혜를 헛된 곳에 쓰지 않고, 용기를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말이다.

 

 구이를 미개한 나라라고 비하한 위단의 말이 살짝 거슬리기는 하나, 화씨벽이나 자하의 이야기 등 익히 알고 있는 것을 새롭고 자세하게 지적해 주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溫故知新과 法古創新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옛것의 좋은 점을 본받아 익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할 줄 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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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지의 표본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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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본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주는 책속의 <표본실>. 문득 이런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뒤로 제쳐둔다.

 

 사이다 공장에서 일하던 여자는 약지의 살점을 일부분 잃고나서 더이상 그 곳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사이다를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하늘하늘 움직이는 살점을 본 후로, 상처의 아픔은 지워졌으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벗어나 도회지로 나온 여자는 표본실에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오래된 아파트 전체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데시마루는 정체모를 무언가가 있다. 여자는 제 용도를 상실한 욕실에서 데시마루와 은밀한 정사를 벌이며, 점점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사랑으로 이름붙여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상대가 주려고 하지 않으면, 청할 수 없는 그것. 과연 그것이 사랑인가는 알듯 모를듯 답답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다.

 

 게다가 데시마루가 선물한 구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조 할아버지가 그 구두를 신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구둣방에 찾아 갔을 때, 할아버지는 벗으려면 지금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럴 수없다. 구두에, 그리고 데시마루에 종속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자유가 없는 사랑일지라도.

 

- 자유롭게 되고 싶지 않아요. 이 구두를 신은 채 표본실에서 그 사람에게 봉인되어 있고 싶어요. (110쪽)

 

 여자는 마침내 약지를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 표본 제작실의 문을 두드린다. 그에게 영원히, 봉인되고 싶었던 것일까.

 

- 데시마루씨는 나의 표본을 소중히 여겨 줄까. 때때로 시험관을 손에 들고, 떠도는 약지를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껏 그의 시선을 받는 것이다. 보존액 속에서 내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아마도 한층 더 맑으리라. (114쪽)

 

 섬뜩하기 짝이 없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물론 사랑이리라. 사랑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진실된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으니까. 나에게 묻는다. 나라면, 구두를 벗었을까. 여자가 구두를 벗지 않고, 영원히 그의 표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려고 했을까.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짜릿한 사랑도, 얽매이는 사랑도 원치 않는다. 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무모해 보이기는 해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제 나름대로의 방식이라 짐작할 뿐이다. 허나 여자가 봉인한 것은 단순히 약지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과연 봉인되어져야 할 성질의 것일까.

 

 그리고 또, 궁금하다. 상처를 봉인한다는 것은 필요한 것일까. 추억은 추억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표본으로 만들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는 발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물론 내가 참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진정 슬픔이라면, 그것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화상을 입은 소녀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라 하더라도.

 

-

 

 책 속의 또다른 이야기. <육각형의 작은 방> 또한 금방 이야기에 빠져버릴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여자는 어느날, 수영장 탈의실에서 미도리를 만나게 된다. 단숨에 자신의 관심을 받은 미도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우연히 밖에서 만나 그들을 뒤따라 간다. 도착한 곳은 사택관리사무실. 하지만 그 곳은 '이야기 작은 방'이라는 묘한 곳이다. <육각형의 작은 방>에서 혼자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하지 못했던 이야기, 억눌려 있던 마음의 이야기.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 곳에서는 말을 한다.

 

 그 곳으로 안내한 셈이 되어버린 미도리는 마음이 어지러운 여자에게 있어 홀려버릴 수 밖에 없는 대상이었을까. 미도리에게 '이야기 작은 방'의 냄새가 났는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웠던 여자는 그 곳을 출입하며 서서히 마음이 정화되어 가고 있었으리라. 마침내 모든 것을 털어냈을 때, '이야기 작은 방'은 사라진다. 아쉬움과 함께, 그 곳이 정말 존재했었는지 의문이 일 정도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방이 존재했던 것일까. 혹, 그 방이 필요했기에 만들어진 환상인 것일까. 방이 사라졌지만, 그는 혼란을 씻어낸다. 그 방의 존재가 더이상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된다. 마음을 고친 것인지, 그 방법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이상 방과의 관계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 방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속삭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돌아보고 성찰할 시간, 혹은 마음껏 내뱉어 버릴 말들을 모아서 내버릴 시간. 나에게도 그 방은 필요할까. 그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나도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보고 싶다. 아니, 말이 아니라도 좋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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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보낸 백 년
조용미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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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의 어느 섬에서 보낸 봄 한철을 묶어 내었다 한다. 개인의 기록, 일기를 이렇게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시인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아니, 그는 치열했으리라. 섬을 시에 담아내야 했으니까. 삶의 열정, 그것이 고스란히 느꼈졌다. 시에 대한 열정도.

 

 10.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55쪽, 流謫)

 

 그는, 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그리움이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그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 지친 마음을 섬이 푸근히 안고 기다리도록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는 섬에서의 3개월을 마냥 은둔한 것은 아니었으니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섬에서는 마냥 외롭다고 한다. 대놓고 외롭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는 이 없는 섬에서의 고독, 그 모르는 이의 존재도 마주치기 힘든 섬에서의 고독.

 

 문득 인간은 섬이 아니다, 라는 존 단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대륙이 한 조각이며, 대륙의 일부분일 뿐, 인간은 섬이 아니다. 그렇기에 섬에서는 육지가 그리워지는 것일까.

 

 32. 나는 늘 바람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바람을 말하지 못하였다. 바람이 늘 광기와 손잡아 왔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바람이 나를 밤의 산속으로 불러내어 컴컴한 숲길을 헤매 다니다 길을 잃기도 했다. 바람이 잠을 데려가 새벽이 되도록 귀를 곤두세우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바람이, 바람이......, 모든 것을 바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가. (88쪽)

 

 그를 키운 것도 8할이 바람이었을까. 바람과 광기는 늘 몰래 붙어 다니며 그를 괴롭혀 왔단다. 하지만 바람도 광기도 그가 찾아간 것일 뿐. 그것을 알고 있기에, 애써 바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그를 책상 앞으로 데려가 시를 쓰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람을 데려와 시로 만든 것임을 안다.

 

 조용미는 이 산문집에 많은 것을 담았다. 그가 가진 시에 대한 열정,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오만함까지 감싸주던, 그 무던한 바람을 담았다. 그 바람을 닮았다.

 

 33. 새벽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새벽 네 시, 전등을 준비해 놓지 못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마음을 만져 본다. 마음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만져지는 이상한 물건. 깨어 여기가 섬인 줄 알았을 때 나는 어땠나. 길 위의 마음이었나 집의 마음이었나. (89쪽)

 

 이 수필집을 반 정도 읽었을 때, 놀랐던 것은 그가 동식물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었다. 그 지식이 이름과 생김에 대한 것 뿐이더라도.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섬에서 보낸 백 년>에 등장하는 많은 꽃과 나무들. 그것들 중에 내가 생김까지 알고 있던 것은 기껏해야 민들레와 진달래, 제비, 목련, 매화, 유채, 동백 정도일까. 그렇기에 그가 안고 있는 지식만큼, 풋풋한 애정이 있었을텐데도 그는 길 위의 마음이지 않았나를 의심한다. 아아,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33. 인간은 공간적 존재다. 현실적인 공간과 환상적인 시간 사이에서 인간의 삶은 이루어지고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세상을 머물다 간다. 한 인간이 평생을 머무르다 가는 공간들이 어쩌면 그 인간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에서 비롯되어지거나 또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작가들이 자기의 영혼과 육체가 합일되는 공간을 찾아 평생을 떠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94쪽)

 

 그는 인간이 공간적 존재라고 단언한다. 자신만의 시공간을 찾기 위한 노력, 그 수많은 노력 중에 진정한 결실을 이루는 씨앗은 몇이나 될까. 한 평생 머무르던 그 곳이 자신을 위한 곳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야말로 허탈하지 않던가. 시인은 아마 그것을 알았던 것이이라. 그렇기에 섬에서 보낸 시간이 마냥 꿈같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리라. 그가 섬을 꿈같이 여겼던 소치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잠시나마 그 섬에 머물러 보고 싶은 소원이 절로 난다.

 

 그리고 궁금하다. 그 섬은 그에게 영혼과 육체가 합일하는 공간이던가.

 

 40. 별이 초파일의 등불처럼 커다랗게 주렁주렁 걸려 있는 섬의 새벽하늘을 바라본다. 저 등불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119쪽) 

 

 시인다운 감성은 곳곳에서 단물을 빨듯 베어 나온다. 스륵, 입맛을 다시게 한다. 섬의 새벽하늘을 보고 싶다. 등불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는 별이, 내게도 피어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애먼 감수성을 탓한다.

 

 99. 말들을 나의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 모든 존재의 현상을 지배하는 말들의 세계, 말들을 다듬어야 한다. 말들의 탑에, 이미지의 탑에 깔려 무너지지 않으려면 말들을 가지런히 쌓아 놓고 줄 세워 놓아야 한다.

 명상과 통찰의 힘이란 개안을 하듯 세상을 새로이 보여 주는 것, 새로움이란 또 무엇인가. 한 우주와 한 세계를 다시 얻는 것 아니던가. 매시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으로 나는 어지럽다. (154쪽)

 

 그는 수많은 말 중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시 속에 담아 내고 싶다는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민망할 정도로 하나없이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릿속 사전에서 무수히 영롱한 언어를 뽑아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그의 삶이며, 동시에 소원이며, 또 바람이다. 나의 고뇌 또한 다르지 않다. 씨실에 날실을 엮어 베를 짜는 옛여인처럼, 무던히도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가 자연의 경이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마침내 다 짜낸 청포의 빛깔에서 땀이 묻어날 때, 그 때 즈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霖

 

-

 

'전혀 새롭다.(96쪽)'는 비문이다. 문장의 호응이 어긋났다. '전혀'를 사용하려면 서술어가 부정이어야 한다. 예.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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