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지의 표본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표본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주는 책속의 <표본실>. 문득 이런 곳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뒤로 제쳐둔다.

 

 사이다 공장에서 일하던 여자는 약지의 살점을 일부분 잃고나서 더이상 그 곳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사이다를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하늘하늘 움직이는 살점을 본 후로, 상처의 아픔은 지워졌으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벗어나 도회지로 나온 여자는 표본실에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오래된 아파트 전체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데시마루는 정체모를 무언가가 있다. 여자는 제 용도를 상실한 욕실에서 데시마루와 은밀한 정사를 벌이며, 점점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사랑으로 이름붙여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상대가 주려고 하지 않으면, 청할 수 없는 그것. 과연 그것이 사랑인가는 알듯 모를듯 답답하지만, 여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다.

 

 게다가 데시마루가 선물한 구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조 할아버지가 그 구두를 신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구둣방에 찾아 갔을 때, 할아버지는 벗으려면 지금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럴 수없다. 구두에, 그리고 데시마루에 종속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자유가 없는 사랑일지라도.

 

- 자유롭게 되고 싶지 않아요. 이 구두를 신은 채 표본실에서 그 사람에게 봉인되어 있고 싶어요. (110쪽)

 

 여자는 마침내 약지를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 표본 제작실의 문을 두드린다. 그에게 영원히, 봉인되고 싶었던 것일까.

 

- 데시마루씨는 나의 표본을 소중히 여겨 줄까. 때때로 시험관을 손에 들고, 떠도는 약지를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껏 그의 시선을 받는 것이다. 보존액 속에서 내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아마도 한층 더 맑으리라. (114쪽)

 

 섬뜩하기 짝이 없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물론 사랑이리라. 사랑의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진실된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으니까. 나에게 묻는다. 나라면, 구두를 벗었을까. 여자가 구두를 벗지 않고, 영원히 그의 표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려고 했을까.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짜릿한 사랑도, 얽매이는 사랑도 원치 않는다. 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무모해 보이기는 해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제 나름대로의 방식이라 짐작할 뿐이다. 허나 여자가 봉인한 것은 단순히 약지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과연 봉인되어져야 할 성질의 것일까.

 

 그리고 또, 궁금하다. 상처를 봉인한다는 것은 필요한 것일까. 추억은 추억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표본으로 만들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는 발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물론 내가 참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진정 슬픔이라면, 그것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화상을 입은 소녀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라 하더라도.

 

-

 

 책 속의 또다른 이야기. <육각형의 작은 방> 또한 금방 이야기에 빠져버릴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여자는 어느날, 수영장 탈의실에서 미도리를 만나게 된다. 단숨에 자신의 관심을 받은 미도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우연히 밖에서 만나 그들을 뒤따라 간다. 도착한 곳은 사택관리사무실. 하지만 그 곳은 '이야기 작은 방'이라는 묘한 곳이다. <육각형의 작은 방>에서 혼자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하지 못했던 이야기, 억눌려 있던 마음의 이야기.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 곳에서는 말을 한다.

 

 그 곳으로 안내한 셈이 되어버린 미도리는 마음이 어지러운 여자에게 있어 홀려버릴 수 밖에 없는 대상이었을까. 미도리에게 '이야기 작은 방'의 냄새가 났는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웠던 여자는 그 곳을 출입하며 서서히 마음이 정화되어 가고 있었으리라. 마침내 모든 것을 털어냈을 때, '이야기 작은 방'은 사라진다. 아쉬움과 함께, 그 곳이 정말 존재했었는지 의문이 일 정도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방이 존재했던 것일까. 혹, 그 방이 필요했기에 만들어진 환상인 것일까. 방이 사라졌지만, 그는 혼란을 씻어낸다. 그 방의 존재가 더이상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된다. 마음을 고친 것인지, 그 방법을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이상 방과의 관계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 방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속삭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돌아보고 성찰할 시간, 혹은 마음껏 내뱉어 버릴 말들을 모아서 내버릴 시간. 나에게도 그 방은 필요할까. 그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나도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보고 싶다. 아니, 말이 아니라도 좋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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