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보낸 백 년
조용미 지음 / 샘터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남해의 어느 섬에서 보낸 봄 한철을 묶어 내었다 한다. 개인의 기록, 일기를 이렇게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시인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아니, 그는 치열했으리라. 섬을 시에 담아내야 했으니까. 삶의 열정, 그것이 고스란히 느꼈졌다. 시에 대한 열정도.

 

 10.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요. (55쪽, 流謫)

 

 그는, 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그리움이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그 그리움도 지치면 서러움이 될까. 지친 마음을 섬이 푸근히 안고 기다리도록 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는 섬에서의 3개월을 마냥 은둔한 것은 아니었으니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섬에서는 마냥 외롭다고 한다. 대놓고 외롭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는 이 없는 섬에서의 고독, 그 모르는 이의 존재도 마주치기 힘든 섬에서의 고독.

 

 문득 인간은 섬이 아니다, 라는 존 단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대륙이 한 조각이며, 대륙의 일부분일 뿐, 인간은 섬이 아니다. 그렇기에 섬에서는 육지가 그리워지는 것일까.

 

 32. 나는 늘 바람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바람을 말하지 못하였다. 바람이 늘 광기와 손잡아 왔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바람이 나를 밤의 산속으로 불러내어 컴컴한 숲길을 헤매 다니다 길을 잃기도 했다. 바람이 잠을 데려가 새벽이 되도록 귀를 곤두세우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바람이, 바람이......, 모든 것을 바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가. (88쪽)

 

 그를 키운 것도 8할이 바람이었을까. 바람과 광기는 늘 몰래 붙어 다니며 그를 괴롭혀 왔단다. 하지만 바람도 광기도 그가 찾아간 것일 뿐. 그것을 알고 있기에, 애써 바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그를 책상 앞으로 데려가 시를 쓰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람을 데려와 시로 만든 것임을 안다.

 

 조용미는 이 산문집에 많은 것을 담았다. 그가 가진 시에 대한 열정,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오만함까지 감싸주던, 그 무던한 바람을 담았다. 그 바람을 닮았다.

 

 33. 새벽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새벽 네 시, 전등을 준비해 놓지 못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마음을 만져 본다. 마음이란 보이지는 않지만 만져지는 이상한 물건. 깨어 여기가 섬인 줄 알았을 때 나는 어땠나. 길 위의 마음이었나 집의 마음이었나. (89쪽)

 

 이 수필집을 반 정도 읽었을 때, 놀랐던 것은 그가 동식물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었다. 그 지식이 이름과 생김에 대한 것 뿐이더라도.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섬에서 보낸 백 년>에 등장하는 많은 꽃과 나무들. 그것들 중에 내가 생김까지 알고 있던 것은 기껏해야 민들레와 진달래, 제비, 목련, 매화, 유채, 동백 정도일까. 그렇기에 그가 안고 있는 지식만큼, 풋풋한 애정이 있었을텐데도 그는 길 위의 마음이지 않았나를 의심한다. 아아,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33. 인간은 공간적 존재다. 현실적인 공간과 환상적인 시간 사이에서 인간의 삶은 이루어지고 우리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세상을 머물다 간다. 한 인간이 평생을 머무르다 가는 공간들이 어쩌면 그 인간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에서 비롯되어지거나 또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작가들이 자기의 영혼과 육체가 합일되는 공간을 찾아 평생을 떠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94쪽)

 

 그는 인간이 공간적 존재라고 단언한다. 자신만의 시공간을 찾기 위한 노력, 그 수많은 노력 중에 진정한 결실을 이루는 씨앗은 몇이나 될까. 한 평생 머무르던 그 곳이 자신을 위한 곳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야말로 허탈하지 않던가. 시인은 아마 그것을 알았던 것이이라. 그렇기에 섬에서 보낸 시간이 마냥 꿈같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것이리라. 그가 섬을 꿈같이 여겼던 소치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잠시나마 그 섬에 머물러 보고 싶은 소원이 절로 난다.

 

 그리고 궁금하다. 그 섬은 그에게 영혼과 육체가 합일하는 공간이던가.

 

 40. 별이 초파일의 등불처럼 커다랗게 주렁주렁 걸려 있는 섬의 새벽하늘을 바라본다. 저 등불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119쪽) 

 

 시인다운 감성은 곳곳에서 단물을 빨듯 베어 나온다. 스륵, 입맛을 다시게 한다. 섬의 새벽하늘을 보고 싶다. 등불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는 별이, 내게도 피어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애먼 감수성을 탓한다.

 

 99. 말들을 나의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 모든 존재의 현상을 지배하는 말들의 세계, 말들을 다듬어야 한다. 말들의 탑에, 이미지의 탑에 깔려 무너지지 않으려면 말들을 가지런히 쌓아 놓고 줄 세워 놓아야 한다.

 명상과 통찰의 힘이란 개안을 하듯 세상을 새로이 보여 주는 것, 새로움이란 또 무엇인가. 한 우주와 한 세계를 다시 얻는 것 아니던가. 매시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으로 나는 어지럽다. (154쪽)

 

 그는 수많은 말 중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시 속에 담아 내고 싶다는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민망할 정도로 하나없이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릿속 사전에서 무수히 영롱한 언어를 뽑아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그의 삶이며, 동시에 소원이며, 또 바람이다. 나의 고뇌 또한 다르지 않다. 씨실에 날실을 엮어 베를 짜는 옛여인처럼, 무던히도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가 자연의 경이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마침내 다 짜낸 청포의 빛깔에서 땀이 묻어날 때, 그 때 즈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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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새롭다.(96쪽)'는 비문이다. 문장의 호응이 어긋났다. '전혀'를 사용하려면 서술어가 부정이어야 한다. 예.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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