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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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허탈해 졌다. 이 책에 실망했다는 말은 아니다. 재미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소재가 근원적인 고독과 단절을 말하고 있었고, 그것에 깊이 동의한 까닭이다.

 

 처음에는 올 해 고희인 이제하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말한다고 했던 것에 놀랐다. 반면, 그래봤자 노인네가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 얼마나 알겠어,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나서야 어리석은 나를 절실히 통감하며, 더불어 사죄하고 싶어졌다.

 

 각설하고, 이제 <능라도에서 생긴 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소설의 시작은 인터넷 사이트 <능라도>에서 친분을 쌓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총 한 자루를 발견한 그들은 이를 두고 신고할 것인지 파묻을 것인지 등에 대해 토의한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의 외국인들이야 이런 논의를 황당하게 여기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총기 소지에 대해 엄격한 나라에서는 민간인이 총을 소지한다는 것은 대경실색할만한 일이다. 총기 난사로 인한 사고가 외국에서 보도될 때에도 한국에서는 혀를 내두른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살인이라봤자 사고로 인한 과실 치사이거나 때려 죽이거나 식칼을 휘두르는 게 대부분인 탓이다. 특히 병역의 의무가 없는 여성이라면, 총기라고 해봤자 평생 TV나 인터넷 등 대중매체에서 보는 게 대다수이지 않은가.

 

 어쨌든 이 기발한 발상을 시작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차례로 돌아가며 총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오프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총이 발사된 것은 여러번이지만, 벽을 향하거나 하늘을 향하거나 하는 등 결국 누군가를 쏘지는 못한다. 정말 제 용도를 다해 살인을 한 적은 단 한 뿐이다. 살인을 한 사람은 '키티'라는 닉네임을 쓰는 62세의 노인, 장성일이었다.

 

 이처럼 내면에 감춰진 파괴력이 폭발하는 것은 바로 총이라는 물건이 생겼기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은 비인간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풀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총이 발사된 적이 단 한 번 뿐이듯 어떤 것을 빌리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 총으로 행한 살인도 장성일의 환상으로 처리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설정 자체를 애초에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지 모른다.

 

 <능라도>에서 만난 이들이 오프 모임을 통해서 만나서도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고, 가족처럼 서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달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 이들도 있으리라. 허나 가족 해체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위안받을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피치못할 상황이며 순서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기존의 체제를 떠올리게 하며, 그와 동시에 파벌을 이루어 물어 뜯고 싸우는 정치판이라던가 수백 수천만을 절벽으로 몰아 세운 이념의 대립이라던가 옳다 그르다 헐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학문과 사상의 길이라던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가상이며 기치인지를 보여준다. 합리적인 이성이 높이 떠받들릴수록 비합리적인 감수성이 폭발하듯 사람들은 가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나는 키치가 싫다. 리고리즘은 더욱 싫다. 허나 누군가를 무언가를 꼭 조롱하고 비하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심리는 어떤 사회에서든 팽배하게 작용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어째서 모든 것이 명확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언제나 한켠에 묻힐 수밖에 없는 논제였다.

 

- 세계가 진화, 분열을 가속하고 사회가 분업, 전문화를 거듭 촉구하더니 부모와 자식이 통하지 않고 우인과 연인들끼리도 소통이 끊겼습니다. 일월과 성신이 빛이 바래고 땅과 하늘도 점차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나마 그런 처방,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대화 재개와 그 회복은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50쪽)

 

 장성일은 <능라도>라는 사이트를 개설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허나 이같은 가상 현실 속에서 속내를 나눈다는 것은 명확한 현실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의 소통만을 재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비현실을 사모하고 그 속을 헤매다니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 허나 그 고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 죽는다는 것은 잠을 잔다는 뜻이고 잠을 잔다는 것은 또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그건 셔터를 누르고 포착된 대상이 현상, 인화돼 다시 태어나는 과정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번데기가 되어 잠자던 애벌레가 나비로 다시 태어나듯이요. 그 순환과 꿈을 버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252쪽)

 

 장성일은 꿈꾸는 자였다. 그 꿈을 이미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죄악을 부른 것은 아닌가. 개인을, 그리고 그 개인의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에 반항한 댓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닌가. 흔히 가치 기준으로 삼던 사랑과 우정, 믿음, 진실 등은 그 가치를 다하고 빛을 잃은 것인가. 그래서 장성일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 되버린 게 아닌가.

 

 유토피아는 도원경과 비슷한 말로 '이상향'을 뜻한다. 허나 그 이면의 숨은 뜻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 그리스어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장성일이, <능라도>의 회원들이 찾던 유토피아는 현실이 아닌 가상 속에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찾는 생의 본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간절한 것이라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 또한 간단하다. 욕망을 버리라고? 그것이 가능하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대답이 아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일치시키면 된다. 그 사이의 괴리를 줄여가면 된다. 그것이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라고, 이 생에서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의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평가로 정의될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다. 삶의 위상은 자신의 건설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의 고독을 인정하고, 타인과 발맞춰 나갈 때 그 고통을 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가 아닐까. 끊임없는 탐색만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내 혼은 아무도 강탈하지 못한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다. 삶을 대면하라. 삶의 고통을,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혼마저 스러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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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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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을 드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엘리 위젤은 그뿐 아니라 중립도 죄악이라 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것이 바로 죄를 더 크게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친구 S의 말이 생각난다. 급진주의자인 S는 나에게 너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보수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모르면 알아라. 모르는 것은 죄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죄다. 그 말이 하나 틀릴 것은 없다. 하지만 막상 나서기에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것을 누가 모르랴. 하지만 그것이 죄인 것은 분명하다. 나 또한 죄인인 것이다. 침묵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죄인.
 

 엘리 위젤은 대다수가 침묵하는 가운데, 그것 또한 죄라며 외치며 이 책을 냈다. 하지만 많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과유불급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고 또한 많은 부분을 처내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는 고통 한가운데에 살면서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낱낱이 드러낸다.

 

 600만명이 넘는 유대인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고, 타오르는 불에 집어 던지고, 가스실에서 피를 토하게 하고, 인간의 기름을 짜내 비누를 만들고, 그 시체를 연료로 사용했던 나치 정권. 아우슈비츠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것들에 대한 표상이라 할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나치에 대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고, 관련 소설들도 제법 보았다. 보면 볼수록 지지부진한 이야기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읽어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내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엄청난 부정이자 학살이며, 죄악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그리고 그와 관련한 소설과 영화 등을 보면서 늘상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측면이다. 역사적 사명감이라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난 그 당시의 세대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도 간접적 경험에 의한 얄팍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깨우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후대의 사람으로써, 인간으로써 그 죄악들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돌이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내 생각을 비웃는 이들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이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의 가족, 친구가 그러한 죽음을 당해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면 그들은 또 반박한다. 어쨌든 지금은 그 세대가 아니잖아.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날리도 없고, 라는 말들도 둘러 댄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다면, 결국 그런 죄악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 어제 침묵을 지킨 사람은 내일도 침묵을 지킬 것이다. (19쪽)

 

 내가, 당신이, 온 세상이 어제 침묵했다면 오늘도 침묵할 것이고 내일도 침묵할 것이다. 그 당연한 이치를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이런 대화가 오고 간다고 해서 나의 생각이나 당신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좋다. 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이라도 기억해 다오.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도 있지만, 당신이 그 계기가 되었다면 어느 곳에서라도 당신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을까. 전능도 구원도 거짓이냐고 신을 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울부짖던 엘리저의 울음을 당신이 외면할 수 있을까.

 

 결국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모두 죽어갈 것이기에. 하지만 그들의 증언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잊는 순간 그 비극은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지금 당장이든 먼 훗날이든 언젠가는 다시 돌이켜질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약은 죄악의 과실이다.

 

 감동하지 않아도 좋다.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그 비극을 기억해다오. 엘리 위젤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닐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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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는 여자
김미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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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박범신의 <나마스테>를 읽고 한 눈에 반해버린 히말라야 산맥이 그려져 있기에 기대했다. 게다가 전반부에 H.H라는 이니셜로 등장하는 남주인공 하훈은 그 거친 히말라야 산을 타는 등산가라 하지 않는가. 허나 기대가 너무 강했던 것인지 뒷맛이 씁쓸하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다 죽어버린 하훈과 자전거를 타는 여자, 미목의 만남은 불륜이 치달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들은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지는데, 급기야 미목이 가출을 해버리면서 시가와 친가 할 것 없이 불같은 화를 낸다. 꽉 막힌 가부장적 가정에서 커 온 미목은 집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해버렸기에 처음으로 다가 온 이 사랑을 억제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타당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의문스럽다.

 

 하훈도 마찬가지다. 암벽 등산가라는 직업 자체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여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가볍고 미지근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못 박았다 한다. 그렇기에 갑자기 다가온 이 운명적 사랑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가출하여 동거하던 미목이 가족들에게 머리채를 쥐어 잡히며 붙들려 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찾아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산을 너무나 사랑해서, 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그것을 무책임하지 않도록 보이게 개연성을 부연하는 것은 작가가 지켜야 할 규칙임에도 불구하고, 김미진은 그것을 어긴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단조롭다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의 흐름을 철저히 깨고 있다. 고개가 갸웃해지든 말든 그것을 방패막이로 삼은 셈이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한다고 비난해도 좋다. 난 그리 관대한 독자가 아니니까.

 

 평소에는 거칠고 고독하지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남자. 평소에는 아름답고 정숙하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요녀가 되어버리는 여자. 이 둘이 만나 사랑을 한다는 설정부터가 너무 전형적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이리도 환상 속을 헤매이는지. 게다가 미목이 남편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다.

 

- 비극으로 완성한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 불륜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것을 증명한다. (앞표지)

 

 비극도 좋고, 사랑도 좋고, 불륜도... 뭐, 좋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랑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찌도 이리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지 답답하다.

 

 소설가이자 화가라는 김미진.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친다는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뭘까. 지나치게 가볍고 단조로운 구성은 극적인 전개도 반전도 없이 허탈하기까지 하다. 전혀 가다듬어지지 않은 문체와 미지근한 심리 묘사, 이해가 안갈 정도로 급작스러운 전환 등도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다.

 

 그래도 이 소설을 보니, 오랜만에 자전거가 타고 싶다. 온 몸으로 바람을 받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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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유용주 지음 / 솔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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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는 시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의 시를 접하지 못했다. 이 수필집 단 한 권뿐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라는 제목부터 흡인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펼쳐 든다. 실은 수필을 즐겨 읽지 않기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고 고백하고자 한다. 친구가 책을 한가득 싸들고 와서 늘어 놓으며 읽으라고 가벼운 윽박을 지르기에 어쩔 수 없이 읽었노라고 말이다. 그런 거부감때문이었을까. 그럭저럭 1장을 읽긴 했으나 마음이 와닿지도 않았고, 짧은 중얼거림에 불과하다 여겨져 책을 접을까, 말까하는 고민을 했었다. 숲에 관한 짧은 단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보니 지루한 감이 있었나 보다. 

 

 허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어느 책이든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1/3까지 읽어본 후에 결정을 내리라 했다. 그 구절을 떠올리며 간신히 2장에 들어서서야 1장에서 느꼈던 고민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수필을 많이 접하지 않았지만, 뭔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밑바닥 인생이라 칭할만한 자신의 치열한 삶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를 보며 숨이 트였다.

 

 타인에게나 스스로에게나 변명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탄했다. 유용주는 삶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었다.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한걸음씩 천천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그의 언어다. 나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대개 비슷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은 대개 고운 언어를 쓴다고 생각했다. 시는 아름답고 고운 언어의 향연이라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을까. 그에 반해 유용주의 언어는 거칠고, 순박하다. 허나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다. 언뜻 보기에 곱지는 않더라도 분명 정제된 언어다. 그런 면에서 유용주는 내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편견을 희미하게 해주었다.

 

- 대부분의 시인들은 거의 고주망태다. 주정뱅이들은 한결같이 조루증 환자들이다. 조루증 환자들은 마음이 착하다. 착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현실 적응력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꿈을 많이 꾼다는 데 있다. 꿈을 많이 꾸는 족속들의 대부분은 정신 병원으로 가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시인이 된다. 시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도 용두질을 많이 해 일찍 죽는다. 천성적으로 객관화하지 못한 꿈꾸기와 용두질이 시를 낳는다. 낳자마자 하루도 못 버티고 죽어가는 새끼들, 시詩들, 시들시들. 나는 지금부터 예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132쪽)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라고 유용주가 말한다. 그리도 자신만만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과 불행, 그리고 술, 담배에 찌든 삶을 겪어 온 그가 어찌 그리도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에게 삶이란 버티는 것, 혹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삶을 사는 그가 어찌도 이리 부러운지 모른다. 아니, 부러움보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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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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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예년에 비해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젊은 작가들의 비중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쯤은 안타까웠고, 또 반쯤은 기대되는 작가들이었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백가흠은 후자다. 그 후자 중에서도 선두를 달린다. 그래서 아직 단 한 권의 단편집밖에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감질난다.

 

 백가흠은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급진적이고 또 낭만적이다. 밑바닥에서 낭만을 찾고 사랑을 부르짖는다. 허나 그 사랑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순수라고 생각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아홉 단편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들은 하나같이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이며, 유아적인 동시에 착란적이다.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을 이루려고 하다보니 비극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종말을 맞이한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사랑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날카로운 묘사가 인상적인 「광어」, 폭풍 '귀뚜라미'가 들이 닥치는 전후의 상황을 담은 표제작 「귀뚜라미가 온다」,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밤의 조건」, 아내의 불륜을 참지 못해 전가족을 살해하는 남자의 「구두」, 세상과 떨어져 사는 남자의 정신상태를 관찰하는 듯한 「전나무숲에서 바람이 분다」, 이국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배(船)의 무덤」,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살인을 통해 사랑을 말하는 「2시 31분」, 김동인 作 <감자>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배꽃이 지고」, 신성모독적이나 순수한 사랑의 경계에 선 소년의 「성탄절」 등 하나도 버릴 것 없는 단편들의 행진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성애가 결핍된 환경에서 성장한 탓인지 여자에게서 그것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결렬되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어른이면서 아이이고, 아이이면서 어른이기 때문에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떼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 남자의 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 원형적인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한없이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사랑은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비롯하여 더욱 더 과격해진다. '자궁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그들에게 좌절을 던져줌으로써 비극 중의 비극, 그 밑바닥을 그리는 것이다.

 

 이런 전형적인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들도 전형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무력한 인물들이다.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나약함과 무력함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그려졌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강력한 의지로 그것들을 물리치고 버텨내려 해도 세상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나약한 여자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동시에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묘한 경계에서 아슬아슬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바로 <귀뚜라미가 온다>이다.

 

 이런 주제와 소재들을 바탕으로 하여 잘 다져진 문체와 날렵한 묘사, 섬뜩한 표현들을 잘 버무려 놓는 작가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팽팽한 긴장이 정신은 물론 육신까지 조여들게 한다.

 

 나는 작가의 초기작, 특히 처녀작은 그들의 거울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피학적 헌신과 폭력적 사랑이 그의 사랑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주는 것들은 하나 같이 모성애가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남자들이 등장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백가흠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 그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글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인격과 성장 환경, 또 당시의 심리를 드러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으니 말이다. 다만 그 상상은 가급적 현실적이어야 하며, 독자에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 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가흠을 만난 것은 행운일 밖에.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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