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허탈해 졌다. 이 책에 실망했다는 말은 아니다. 재미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소재가 근원적인 고독과 단절을 말하고 있었고, 그것에 깊이 동의한 까닭이다.

 

 처음에는 올 해 고희인 이제하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말한다고 했던 것에 놀랐다. 반면, 그래봤자 노인네가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 얼마나 알겠어,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나서야 어리석은 나를 절실히 통감하며, 더불어 사죄하고 싶어졌다.

 

 각설하고, 이제 <능라도에서 생긴 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소설의 시작은 인터넷 사이트 <능라도>에서 친분을 쌓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총 한 자루를 발견한 그들은 이를 두고 신고할 것인지 파묻을 것인지 등에 대해 토의한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의 외국인들이야 이런 논의를 황당하게 여기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총기 소지에 대해 엄격한 나라에서는 민간인이 총을 소지한다는 것은 대경실색할만한 일이다. 총기 난사로 인한 사고가 외국에서 보도될 때에도 한국에서는 혀를 내두른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살인이라봤자 사고로 인한 과실 치사이거나 때려 죽이거나 식칼을 휘두르는 게 대부분인 탓이다. 특히 병역의 의무가 없는 여성이라면, 총기라고 해봤자 평생 TV나 인터넷 등 대중매체에서 보는 게 대다수이지 않은가.

 

 어쨌든 이 기발한 발상을 시작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차례로 돌아가며 총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오프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총이 발사된 것은 여러번이지만, 벽을 향하거나 하늘을 향하거나 하는 등 결국 누군가를 쏘지는 못한다. 정말 제 용도를 다해 살인을 한 적은 단 한 뿐이다. 살인을 한 사람은 '키티'라는 닉네임을 쓰는 62세의 노인, 장성일이었다.

 

 이처럼 내면에 감춰진 파괴력이 폭발하는 것은 바로 총이라는 물건이 생겼기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은 비인간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풀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총이 발사된 적이 단 한 번 뿐이듯 어떤 것을 빌리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 총으로 행한 살인도 장성일의 환상으로 처리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설정 자체를 애초에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지 모른다.

 

 <능라도>에서 만난 이들이 오프 모임을 통해서 만나서도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고, 가족처럼 서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달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 이들도 있으리라. 허나 가족 해체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위안받을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피치못할 상황이며 순서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무너지고 있는 기존의 체제를 떠올리게 하며, 그와 동시에 파벌을 이루어 물어 뜯고 싸우는 정치판이라던가 수백 수천만을 절벽으로 몰아 세운 이념의 대립이라던가 옳다 그르다 헐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학문과 사상의 길이라던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가상이며 기치인지를 보여준다. 합리적인 이성이 높이 떠받들릴수록 비합리적인 감수성이 폭발하듯 사람들은 가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나는 키치가 싫다. 리고리즘은 더욱 싫다. 허나 누군가를 무언가를 꼭 조롱하고 비하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심리는 어떤 사회에서든 팽배하게 작용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어째서 모든 것이 명확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언제나 한켠에 묻힐 수밖에 없는 논제였다.

 

- 세계가 진화, 분열을 가속하고 사회가 분업, 전문화를 거듭 촉구하더니 부모와 자식이 통하지 않고 우인과 연인들끼리도 소통이 끊겼습니다. 일월과 성신이 빛이 바래고 땅과 하늘도 점차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나마 그런 처방,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대화 재개와 그 회복은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50쪽)

 

 장성일은 <능라도>라는 사이트를 개설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허나 이같은 가상 현실 속에서 속내를 나눈다는 것은 명확한 현실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의 소통만을 재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비현실을 사모하고 그 속을 헤매다니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 허나 그 고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 죽는다는 것은 잠을 잔다는 뜻이고 잠을 잔다는 것은 또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그건 셔터를 누르고 포착된 대상이 현상, 인화돼 다시 태어나는 과정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번데기가 되어 잠자던 애벌레가 나비로 다시 태어나듯이요. 그 순환과 꿈을 버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252쪽)

 

 장성일은 꿈꾸는 자였다. 그 꿈을 이미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죄악을 부른 것은 아닌가. 개인을, 그리고 그 개인의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에 반항한 댓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닌가. 흔히 가치 기준으로 삼던 사랑과 우정, 믿음, 진실 등은 그 가치를 다하고 빛을 잃은 것인가. 그래서 장성일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 되버린 게 아닌가.

 

 유토피아는 도원경과 비슷한 말로 '이상향'을 뜻한다. 허나 그 이면의 숨은 뜻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 그리스어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장성일이, <능라도>의 회원들이 찾던 유토피아는 현실이 아닌 가상 속에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찾는 생의 본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간절한 것이라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결 또한 간단하다. 욕망을 버리라고? 그것이 가능하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대답이 아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일치시키면 된다. 그 사이의 괴리를 줄여가면 된다. 그것이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라고, 이 생에서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의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평가로 정의될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다. 삶의 위상은 자신의 건설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의 고독을 인정하고, 타인과 발맞춰 나갈 때 그 고통을 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가 아닐까. 끊임없는 탐색만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내 혼은 아무도 강탈하지 못한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다. 삶을 대면하라. 삶의 고통을, 고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혼마저 스러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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