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는 예년에 비해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젊은 작가들의 비중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쯤은 안타까웠고, 또 반쯤은 기대되는 작가들이었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백가흠은 후자다. 그 후자 중에서도 선두를 달린다. 그래서 아직 단 한 권의 단편집밖에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감질난다.

 

 백가흠은 젊은 작가들 중에서도 급진적이고 또 낭만적이다. 밑바닥에서 낭만을 찾고 사랑을 부르짖는다. 허나 그 사랑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순수라고 생각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아홉 단편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들은 하나같이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이며, 유아적인 동시에 착란적이다.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을 이루려고 하다보니 비극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종말을 맞이한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사랑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날카로운 묘사가 인상적인 「광어」, 폭풍 '귀뚜라미'가 들이 닥치는 전후의 상황을 담은 표제작 「귀뚜라미가 온다」,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는 「밤의 조건」, 아내의 불륜을 참지 못해 전가족을 살해하는 남자의 「구두」, 세상과 떨어져 사는 남자의 정신상태를 관찰하는 듯한 「전나무숲에서 바람이 분다」, 이국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배(船)의 무덤」,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살인을 통해 사랑을 말하는 「2시 31분」, 김동인 作 <감자>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배꽃이 지고」, 신성모독적이나 순수한 사랑의 경계에 선 소년의 「성탄절」 등 하나도 버릴 것 없는 단편들의 행진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성애가 결핍된 환경에서 성장한 탓인지 여자에게서 그것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결렬되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어른이면서 아이이고, 아이이면서 어른이기 때문에 욕구가 좌절되었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떼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 남자의 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 원형적인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한없이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사랑은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비롯하여 더욱 더 과격해진다. '자궁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그들에게 좌절을 던져줌으로써 비극 중의 비극, 그 밑바닥을 그리는 것이다.

 

 이런 전형적인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들도 전형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무력한 인물들이다.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나약함과 무력함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그려졌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강력한 의지로 그것들을 물리치고 버텨내려 해도 세상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나약한 여자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동시에 현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묘한 경계에서 아슬아슬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바로 <귀뚜라미가 온다>이다.

 

 이런 주제와 소재들을 바탕으로 하여 잘 다져진 문체와 날렵한 묘사, 섬뜩한 표현들을 잘 버무려 놓는 작가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팽팽한 긴장이 정신은 물론 육신까지 조여들게 한다.

 

 나는 작가의 초기작, 특히 처녀작은 그들의 거울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피학적 헌신과 폭력적 사랑이 그의 사랑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주는 것들은 하나 같이 모성애가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남자들이 등장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백가흠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이것이 그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글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인격과 성장 환경, 또 당시의 심리를 드러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으니 말이다. 다만 그 상상은 가급적 현실적이어야 하며, 독자에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 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가흠을 만난 것은 행운일 밖에.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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