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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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쩐의 전쟁>과 비슷한 내용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싶다. 백수인 청년이 재야의 고수에게 발탁되어 돈 굴리는 법을 익히고, 돈을 융통하는 과정에서 시험을 당하고, 결국 사부의 비법을 모조리 전수받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다는 등 줄거리면에서 굉장히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다. 드라마뿐 아니라 TV 자체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우연찮게 <쩐의 전쟁>의 첫 편과 마지막 편만을 보게 되었는데도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 참 안타깝다. 배금주의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거나 주인공이 죽는다 등의 차이점을 열거해 다르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지만,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그런 것들을 다 제쳐놓고, 이 책이 그럭저럭 볼 만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소 드라마의 영상미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더불어 책의 구성은 단적으로 싱겁기 짝이 없지만, 주인공 시라토의 말처럼 손해 본 느낌은 들지 않아 다행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작은 드라마 <쩐의 전쟁>과 흡사하다. 청춘을 탕진하던 백수 시라토가 고즈카의 손에 걸려, 동기들보다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 그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고즈카는 나름대로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돈만 믿으며 성장한 인물인데, 실은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변액보험의 피해자로, 사건이 터진 후에 정신을 놓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버블경제 이후 변액보험의 피해자들이 속속들이 증가하며, 고즈카가 그에 복수하기 위해 가을 빅딜을 준비한다. 이후, 고즈카가 당했던 비극은 시라토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고즈카 노인이 그를 속인 것이다.

 

 이시다 이라가 나름대로 준비한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닥 놀랍지도 않을 뿐더러 사건의 굴곡은 지나치게 완만해서 독자를 데면데면하도록 만든다. 우중충하고 밋밋한 분위기도 변하지 않는다. 허나 이러한 시선은 돈으로 무장하고, 그것을 떠받는 사회의 비정함에 대해 더욱 강조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중소 기업의 사장이나 입을 법한 정장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먼저 입사한 동기들보다 높은 월급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마켓의 파도 속에 난무하는 숫자와 그래프를 줄줄 외고 다니는 시라토의 모습은 실로 멀게만 보인다. 이같은 괴리는 점차 무뎌지고 있지만, 그 답답한 현실의 숨막히는 뒤쫓김은 잊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이시다 이라가 사회가 고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일테다. 다만 이 사회가 종언하기 전에 현실의 비극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부터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직 늦지 않았다. 스타트! 이제 시작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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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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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그대로 <토끼와 함께한 그해>이다. 일상에 지쳐 무기력하게 매일을 보내는 바타넨이 우연찮게 토끼와 만나게 되고, 그 토끼와 1여년 동안 여행을 하며 겪게 되는 것이 줄거리다. 비교적 이 단순한 플롯 속에서 독자는 끊임없이 작가의 저의가 궁금해진다. 게다가 바타넨이 아무리 일상에 지쳤다지만, 시작부터가 난해하다. 요즘 그 어느 현대인이 고정된 직장과 수입, 편한 집, 몇 십년을 같이 한 아내, 할부도 끝나지 않은 보트를 버리고 여행을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바타넨 뿐만 아니다.

 

 직업도 없이 대통령의 신상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불도저를 끌고 강 한가운데에 빠지는 사람이 있고, 장작을 얻기 위해 이웃집 난간을 부러뜨리는 사람이 있다. 뿐만 아니다. 민간인이 살고 있는 산장에 군인들이 몰려와 사령부로 쓰겠다고 하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동면에서 깨어나 성난 곰을 죽이기 전에 구경해 봐야 겠다고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바타넨에게 가장 괴로웠던 일은 곳곳에서 자신의 토끼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에 둘러 싸이게 되는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그런 위험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한 일들이 법을 저촉하여, 결국 감옥에 갇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아르토 파실린나는 이런 요지경 세상 속에서 양심에 손을 얹고 바르게 살아 가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를 주제로 두고 역설하고 있다. 어느새 거리의 무법자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 바타넨에게 자유란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듯 싶다. 억압과 본능에 의해 일상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육체적 노동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었던 바타넨에게 작은 감옥은 그야말로 지옥이지 않을까. 그 순간 토끼가 곁에 없다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타넨은 결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토끼를 되돌려 받고, 지옥같은 감옥을 탈출한다. 대통령 신상에 관한 연구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지금껏 여행을 하던 도중 그는 나름의 양심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억압하고 절제했지만, 결국 자유를 빼앗기자 허울좋던 약속조차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역설과 풍자들은 곳곳에서 베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토끼와 함께한 그해>라는 열매는 그 빛깔과 향이 배가한다. 단순히 유쾌 발랄한 소극(笑劇)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분명 이 책은 노골적일 정도로 우연성이 넘치고 황당무계하지만, 그 과장은 단순한 웃음만 일으키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사회적 풍자와 해학이 너울치기 때문이다. 다행한 것은 바타넨이 여행한 핀란드가 그렇게 모순이 넘치는 사회였지만, 그의 탈옥으로서 어느 정도의 희망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혹여 자신의 삶과 대비하여 실망할 것은 없다.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간극이 있지만, 그 간극을 메꾸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지 않는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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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이 들려주는 축소지향의 일본인 세트 - 전2권 -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지식의 샘
이어령 지음, 김준연 그림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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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아니 적어도 서양인들은 일본문화를 환상적인 것으로만 치부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고찰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 중요한 점은 일본의 문화와 비교하는 표본이 서양의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이라는 것에 있어 의미가 더한다. 아시아라는 공통점 가운데 차이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같은 문화를 가지고도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일은 좀처럼 생각치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이 책에서 그 점을 찾아 내어 부각시켰고, 일본인의 문화를 축소지향적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 문화간의 차이점이 바로 이러한 성향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좁은 다다미방이 훨씬 더 익숙한 그들의 문화다. 어린 아이들에게 벌을 줄 때, 서양인들은 좁은 방안에 가둬 버리지만 일본인들은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좁은 다다미문화에서 안정감을 찾기 때문에 넓은 바깥 세상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므로 내보내는 것을 벌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들의 축소지향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결과이다.

 

 또 이 책에서는 여섯가지 모형을 두고 일본인들의 축소지향적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레코형, 쥘부채형, 아네사마형, 도시락형, 노멘형, 문장형이 바로 그 여섯가지이다. 이 중에서 가장 수긍이 가는 설명을 하는 것은 쥘부채형과 도시락형을 꼽을 수가 있다. 중국에서는 시원한 바람을 위해 큰 부채를 선호했지만, 일본인들은 그것을 손 안에 넣을 수 있도록 쥘부채형으로 개조했다는 것이다. 또 집 밖에서도 완전한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축소시킨 도시락형이 그 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도시락으로 김밥을 꼽는다. 그것은 상에 차려진 모든 음식의 축소라기 보다 그저 간단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인들처럼 식탁 자체를 손 안에 넣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이 책에서 때때로 수긍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만, 사실 그에 앞서서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일본인의 모든 행동을 축소지향에 맞추기 위해 좋을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탓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나 정황적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였다는 말이다. 그들의 대표적 문화를 통찰한 것은 매우 사려깊은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이러한 단편적인 정황만을 두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어령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분석력으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재미있게 풀어 썼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럽지만, 이것만으로 그들을 축소지향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성급한 결론은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나 그에 따른 결과를 무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잘못되었거나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성향들이 반드시 일반적이지 않다는 여지를 남겨 두고 책을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이 매우 놀라운 통찰력과 재미를 느끼게 해줬던 거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어령 선생님과 함께한 일본 문화 여행은 분명 즐거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일본인이 축소지향이든 확대지향이든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나 기술에서 훌륭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치'가 '기무치'로 둔갑하는 일 등을 좌시하고 있는 것은 마냥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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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인간적인 삶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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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에 썼던 리뷰들을 대충 훑어 보면 유난히 '자유'를 많이 부르짖었던 것 같다. 즉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만드는 책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만나게 된 김우창의 <자유와 인간적인 삶>은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 가능한가에 물음표를 찍고 있어, 흥미로운 만남을 예감했다. 중반부가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자유에 대한 갈망, 그것은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도 자유를 갈망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그 생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갈망을 들을 수 없기에 제외하도록 하자. 어쨌든 이러한 자유는 언제나 자유를 누릴 수 없도록 하는 압력과, 그에 대한 극복, 또 다른 압력, 또 그것에 따른 극복 순으로 늘 진화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자유에 대한 고찰은 이러한 돌림노래 같은 현상 끝에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없도록 하는 압력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빈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먼저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오래된 난제에 해답을 제시하며, 일약 스타가 된 페렐만의 경우를 예로 든다. 이 문제에 해답을 제시한 대가로 한 연구소에 내놓은 100만 불의 상금을 거절하고, 필즈 메달 수여를 거부하였으며, 스탠포드나 프린스턴 대학에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마저 물리친 기행을 자유라 표하고 있다. 이러한 페렐만의 기행은 세계 각종 신문에 대서특필된 바 있다. 그럴 수밖에. 흔히 사람들은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그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곤 하는데, 페렐만은 이를 일언지하에 처내버린 탓이다. 페렐만은 학문하는 사람의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몸소 표현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하게 살피고 있는 점은 쉴러의 심미적 국가의 발현이다. 심미적 형상화를 통해 도덕을 자유에 호소함으로써 평등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현실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이상일 뿐 직접 실현시키기에는 문제가 많아 보인다.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경쟁은 언제나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구속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평등한 분배를 통한 평등한 사회 실현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심미적 국가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쉴러는 이것을 '열렬한 행동가들이 본질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평등이 미적 보임의 영역에서 달성되는 것을 본다. (177쪽)'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상에 불과할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향한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는 '그것이 중요한가?' 라는 물음은 '왜 사는가?' 하는 물음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물론 그의 말대로 금방 답을 알 수 있고, 금방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물음들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 제시 없이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허나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라는 우스갯 소리처럼 이미 그 해답은 우리 모두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이 쉽게 없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우아, 양보, 위엄, 사랑, 우애 등은 분명 중요한 것들이다. 그것만이 굴종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비록 값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그것은 자유의 무가치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로 값을 따질 수 없을만큼 중요한 것이며, 인간적 본성을 일깨우는 바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선설을 믿지는 않지만, 그가 말한 노력 끝에 자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

 

 현실적 이성을 요구하는 현대에 감성은 불필요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사람은 홀로 자율적 존재가 될 수 없다. 타율이 있고 나서야 자율이 생길 수 있듯이 자유로운 개인이 관계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허나 자유로운 개인들이 관계 속에서 끝없는 욕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리라는 믿음을 잃고 싶지 않다.

 

 외부의 압력, 즉 폭력이나 규칙 등이 아닌 자율적 책임과 필연성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는 날이 올까. 나와 마찬가지로 김우창 또한 긍정적인 답변은 하고 있지 않다. 허나 당장 실현 불가능하더라도 그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이 진실임을 나 또한 믿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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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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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어를 낚는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곳은 바로 미국이라는 강이다. 그는 강가에 드리운 낚싯대를 끝내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지 못한 탓이다. <미국의 송어낚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잃어버린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자본의 풍요는 이루어졌지만, 정신적 풍요가 밑바탕되지 못한 까닭이다. 영영 그것을 되찾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위기의식이 전제로 되었다는 말이다.

 

 브라우티건은 송어낚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내가 내키는대로 해석하자면, 그 이유가 시대적 요청에 의한 사명감에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을 비판하는 태도에 비해 의미가 모호하고 환상적인 신비를 그리게 되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현실에 반하는 것들을 지향하면서도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은 그 탓이 아닐까.

 

 흔히 비평가들은 <미국의 송어낚시>가 목가적이며 전원적이라 한다. 목가와 전원이 이러한 의미로도 되새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다소 어지럽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얼핏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풍자는 독자를 섬칫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유폐감을 느끼게도 한다. 그것은 차마 들춰내기 힘들 정도로 비참해 감춰두고 싶은 성질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랍고, 또 경이적으로 느껴진다. 또 한편으로는 그 모호함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마냥 읽기 쉽지는 않다. 나 역시 보충설명과 주를 보고서야 이해한 적이 많아, 얇은 지식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송어낚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은 바로 「클리블랜드 폐선장」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자연은 소모적인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으나 그 통속적인 비판이 절실히 와닿았던 것이다. 그 중, '중고품 송어하천을 팝니다. 진가를 아시려면 직접 보십시오.(217쪽)'라는 구절에서, 상점 주인이 중고품 송어하천을 팔기 위해 핏대를 세우는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오게 되는 경험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아닐까.

 

-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7년 동안 낚시를 하러 갔는데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나는 낚싯바늘에 걸린 송어를 전부 놓쳐버렸다. 그것들은 펄쩍 뛰어오르거나 또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거나 또는 몸부림쳐서 빠져나가거나 또는 내 낚싯줄을 끊거나 또는 수면으로 떨어지면서 빠져나가거나 또는 자신의 살점을 떼내면서 빠져나갔다. 나는 송어에 손을 대본 일조차 없다. 이러한 좌절과 당혹스러움에도 나는 믿는다. 놓친 송어의 총계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었음을. 그러나 내년에는 다른 어느 누군가가 또 송어낚시를 하러 가야만 할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군가가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181-182쪽)

 

 하지만 이로 인해 절망하고, 피를 토하며 상실의 아픔을 절절히 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마냥 부정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한 후에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둠 속의 빛이 더 밝아 보이듯 절망 속의 희망이 더 생기를 발하듯 문제에 대한 인식도 조화 속에서 진보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도움 또한 필요하다. 다른 어느 누군가 또다시 송어낚시의 실패로 인해 눈물 짓기 전에 힘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꿈을 향하는 길에 놓여 있다. 그 여로가 고되고 어려울지라도 꿈을 찾는 노력이 있어야만 진정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방향을 정하는 데에는 냉정이 필요하지만, 달리는 데에는 열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 모두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지나친 꿈은 아니길.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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