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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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어를 낚는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곳은 바로 미국이라는 강이다. 그는 강가에 드리운 낚싯대를 끝내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지 못한 탓이다. <미국의 송어낚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잃어버린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자본의 풍요는 이루어졌지만, 정신적 풍요가 밑바탕되지 못한 까닭이다. 영영 그것을 되찾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위기의식이 전제로 되었다는 말이다.

 

 브라우티건은 송어낚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내가 내키는대로 해석하자면, 그 이유가 시대적 요청에 의한 사명감에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을 비판하는 태도에 비해 의미가 모호하고 환상적인 신비를 그리게 되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현실에 반하는 것들을 지향하면서도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은 그 탓이 아닐까.

 

 흔히 비평가들은 <미국의 송어낚시>가 목가적이며 전원적이라 한다. 목가와 전원이 이러한 의미로도 되새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다소 어지럽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얼핏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풍자는 독자를 섬칫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유폐감을 느끼게도 한다. 그것은 차마 들춰내기 힘들 정도로 비참해 감춰두고 싶은 성질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랍고, 또 경이적으로 느껴진다. 또 한편으로는 그 모호함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마냥 읽기 쉽지는 않다. 나 역시 보충설명과 주를 보고서야 이해한 적이 많아, 얇은 지식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송어낚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은 바로 「클리블랜드 폐선장」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자연은 소모적인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으나 그 통속적인 비판이 절실히 와닿았던 것이다. 그 중, '중고품 송어하천을 팝니다. 진가를 아시려면 직접 보십시오.(217쪽)'라는 구절에서, 상점 주인이 중고품 송어하천을 팔기 위해 핏대를 세우는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오게 되는 경험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아닐까.

 

-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7년 동안 낚시를 하러 갔는데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나는 낚싯바늘에 걸린 송어를 전부 놓쳐버렸다. 그것들은 펄쩍 뛰어오르거나 또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거나 또는 몸부림쳐서 빠져나가거나 또는 내 낚싯줄을 끊거나 또는 수면으로 떨어지면서 빠져나가거나 또는 자신의 살점을 떼내면서 빠져나갔다. 나는 송어에 손을 대본 일조차 없다. 이러한 좌절과 당혹스러움에도 나는 믿는다. 놓친 송어의 총계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었음을. 그러나 내년에는 다른 어느 누군가가 또 송어낚시를 하러 가야만 할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군가가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181-182쪽)

 

 하지만 이로 인해 절망하고, 피를 토하며 상실의 아픔을 절절히 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마냥 부정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한 후에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둠 속의 빛이 더 밝아 보이듯 절망 속의 희망이 더 생기를 발하듯 문제에 대한 인식도 조화 속에서 진보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도움 또한 필요하다. 다른 어느 누군가 또다시 송어낚시의 실패로 인해 눈물 짓기 전에 힘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꿈을 향하는 길에 놓여 있다. 그 여로가 고되고 어려울지라도 꿈을 찾는 노력이 있어야만 진정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방향을 정하는 데에는 냉정이 필요하지만, 달리는 데에는 열정이 필요한 법이다. 그 모두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지나친 꿈은 아니길.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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