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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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미국 노예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다의 성당은 스페인이 배경이지만, 일단 노예제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욱 더 분노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 책에서는 성서에 관련하여 기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자들조차 노예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게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염려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이다.

 

 당시 계급사회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불평등과 계급에서 오는 차별, 고난 등을 <바다의 성당>에서는 아주 자세히 보여준다. 특히 첫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노예의 초야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이는 실로 그 시대의 악습에 대한 적나라한 시선을 담고 있다.

 

 <바다의 성당>에서 보여주는 시대보다 더 오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주민들은 초야권에 대한 반발심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전에 알고 있었다. 책의 시대적 배경으로 가면, 서서히 노예와 영주민들의 반발, 의식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노예에 대한 처우 개선 과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아버지 베르나뜨는 한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아들 아르나우를 데리고 영지를 도망친 것이다.

 

 책은 아들 아르나우가 커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사회적 변화, 그 격동 속에서 거쳐야 했던 괴로움과 사랑 등을 담고 있다. 아르나우는 수많은 난관을 딛어야 했지만, 결국 역경 속에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극적인 전개 과정은 실로 작위적이라 할만큼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며,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불가해가 안타까웠다. 더불어 절제성이라고는 눈꼽만치 찾아 볼 수 없는 전개와 묘사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할 수 있으리라.

 

 근래에 팩션을 읽을 기회가 많았는데, 나에게 가장 맞지 않았던 책이 아닐까 한다. 상하권을 합쳐 약 9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지리한 전개라던가 불가상성한 연결고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독자인 내가 충실한 책읽기를 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일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느슨한 텐션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하는 바다.

 

 허나 중세 계급 사회에 대한 허와 실에 대해 잘 짚어 나가고 있다는 점, 나름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는 점,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뚜렷했다는 점, 민중의 애환을 여과없이 잘 드러냈다는 점 등은 <바다의 성당>의 강점으로 거론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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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문답 - 東湖問答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0
이이 지음, 안외순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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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얇은 책 한 권에 율곡 이이의 정치사상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에 감탄을 토로하고자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알아 본 적도 없다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국폐國幣에 초상화가 새겨질 정도의 훌륭한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소홀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호문답>은 율곡이 선조에게 바치는 '마음'이다. 율곡은 일평생을 선조가 왕도정치를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많은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는 그를 멀리했다.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된 선조로서는 당시 등장한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켜야 했으며, 그 까닭에 의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알다시피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조차 투옥되고 사형의 위기에 몰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왕의 세력이 약화된 때에 너무 강한 지지 기반을 가진 자가 생겨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정도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로서는 율곡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율곡은 선조에게 왕도정치를 실현토록 하기 위해 충정을 다하였지만, 선조는 그것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율곡에게 집중시켜 주어야 하고 그를 지지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곡의 성품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율곡 스스로는 아무리 충정을 다하여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의 권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런저런 요인으로 인해 율곡은 선조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사망 직전에는 높은 관직을 받고, 선조가 그를 신임하였기 때문에 자칫 선조의 애정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하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선조는 탕평을 위해 이 무리 저 무리를 번갈아 신임했던 까탈스러운 인물이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곡을 멀리하기만 했다. 다만 율곡의 노후에 그를 신임하여 곁에 두려고 높은 관직을 주었으나, 율곡이 이미 늙어 정사를 논하기 힘들어진 탓에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율곡과 선조의 관계는 묘했다. 율곡은 선조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흠모하며 성군이 되시리라 하고 기대하였다. 허나 선조는, 이미 언급했듯이 여러 이유들로 인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율곡은 그런 선조를 두고, 처음과 달리 세속에 물들었다며 비판했다. 율곡은 선조의 눈에 들기 위해 간언을 올리지 않았으며, 에둘러 표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선조를 보고, 있는 그대로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으며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동호문답>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그를 성군이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조의 형식적인 정치에 대해 비판한다. 더불어 좋은 신하를 등용해야 한다며,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임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허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쓴 말은 내뱉고 싶어지는 법이다. 선조는 점점 율곡을 멀리하고, 율곡 또한 더욱 더 과격한 언사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결국 율곡은 그런  출사와 퇴사를 반복한다. 마침내 율곡은 참지 못하고, 경연 석상에서 맹자가 제 선왕에게 했던 질문을 선조에게 그대로 던졌다 한다.

- 지금 민생이 곤궁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온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함이 심한데 가령 맹자가 주상께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는다면 주상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허나 선조는 대답하지 않았고, 율곡은 선조를 포기한다. 정녕 선조가 왕도정치를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하는 한탄과 함께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훗날 선조가 그를 신임하지만, 율곡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병중에 있었다. 율곡의 정치 사상은 매우 훌륭하고 또렷했지만, 그것을 이룰 재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율곡은 정치인이기보다 문학자로서 명성을 더 높이 날린다. 

 그는 왕도정치를 행하기 위한 첫번째 방안으로서 입지를, 두번째 방안으로서 무실을 주장하는데 그 부분은 [제 7장 무실務實이 수기修己의 요체임을 논하다]에 잘 드러나 있다. 율곡은 주상(선조)이 '입지志보다 앞서는 것이 없지요.'라고 말한다. 더불어 궁리진성窮理盡性, 신민新民, 형우과처刑于寡妻, 모자토계茅茨土階, 박시제중博施濟衆, 수명예악修明樂이라는 여섯가지를 입지의 세부 항목으로 든다. 즉,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며, 백성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만들며, 아내에게 모범이 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며,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며, 예악을 닦아 밝히라는 것이다. 더불어 힘써 실천하라는 뜻의 무실을 한다면 선조는 반드시 왕도정치를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율곡은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 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즉 선조가 왕도정치를 행할 뜻이 있고, 그것을 실천하기에 있는 힘을 다한다면 당연히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또  좋은 신하를 적재적소에 임용할 것과 충신과 간신을 가려 상벌을 뚜렷이 할 것, 안민정책을 펼칠 것, 교육 정책을 개선할 것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안민정책에 관해서는 과세 제도와 공물 제도의 개선, 공물 대납을 통해 이방들의 횡포 금지, 각 지방마다 다른 부역을 균형잡히게 나눌 것과 가렴주구 근절 등의 상세한 사항방법까지 하나하나 제시한다.

 위에서 본 것과 율곡은 선조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는데, 나 또한 선조와 율곡 모두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냥 한 쪽만을 손들어 주기에는 둘 다의 감정과 행동이 이해되는 탓이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과연 유교가 그리도 폄하해야 할 대상인가. 나로서는 아직 지식이 짧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겠다. 더군다나 <동호문답>에 등장하는 율곡의 유교적인 가르침은 너무나 미화되어 있어, 이것이 제대로 실천된다면 정말 안민한 세상이 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탓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한다. 율곡의 가르침처럼 각종 제도의 개혁과 가렴주구의 근절 등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만 속세에 물들어, 그것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짧은 지식이라고 하나 장유유서長幼有序, 남존여비男尊 사상 등이 유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난 뒤에 논하는 것이 옳으리라 여기는 까닭이다. 또한, 어떤 이념이든 깊숙한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수긍할만한 논리들로 가득차 있지 않던가. 물론 폐단 또한 어디에나 산재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의 본질을 훼손하고 그릇된 목적에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폐단을 시정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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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도 - 사이코 북스 05
로저 케네디 지음, 강신옥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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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비도는 프로이트의 정신성욕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로저 케네디의 <리비도>에서는 프로이트 이론의 초기 입장에 서서 리비도를 보고 있다. 먼저 리비도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의 초기 이론 관점에서 보며, 인생 단계에서 나타나는 리비도의 발달 등을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 이전까지는 성욕이라는 것이 청소년기, 즉 사춘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소아성욕설이 등장한 후 많은 부분에서 인식이 바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소아 성욕 발달 단계에 관해서는 '성격 발달 단계', '심리 성적 발달 단계' '성격 발달 5단계'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것의 개념에 대해서는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본 것일 테다. '구강기 > 항문기 > 남근기 > 잠복기 > 생식기'라는 이 5단계의 발달 속에서 소아는 심리적, 성적, 성격적으로 발달하게 되는데, 이 단계적 발달에서 어느 한 단계에 지나친 만족감을 갖거나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 발달 장애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프로이트의 심리 성적 발달 이론이다.

 

 로저 케네디는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대상관계 이론에 대해서도 잠깐 소개한다. 대상관계 이론은 프로이트 이론이 개인의 내면세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 주체와 그 환경 간의 관계, 특히 어머니와 유아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론이다. 대상관계 이론은 내면세계를 벗어나 외면세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신분석학의 범위를 더 넓혀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이론에서는 성욕이 차지했던 영역을 제치고 더 높은 지지를 얻어 내었다.  현대 정신분석학 안에서는 더이상 리비도를 가장 바른 개념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역시 기본적으로 리비도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 성적 발달단계에서 리비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각 발달 단계에서 오는 심리 성적 에너지를 리비도라 칭한다. 책에서는 이것을 신경증, 정신증, 성도착증, 나르시시즘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발달 5단계를 적절히 넘기지 못한 소아들은 어느 한 부분에 고착하게 되어 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 상태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장애라 할 수 있다. 특히 발달 단계 도중 금욕, 즉 리비도의 억누름은 정신적 장애나 공황 상태를 더욱 더 심한 지경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한 부분뿐만 아니라 각 발달 단계에서 부분적인 충동들이 모여 정신적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변형된 회로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그의 이론을 더욱 더 난항에 빠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나와 같은 일반 독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일뿐, 프로이트는 물론 로저 케네디는 그것을 능숙하게 풀어낸다.

 

 케네디는 마지막으로, 리비도적 문명이 다가올 것을 예견하며 이 책을 덮는다. 억압적인 문명이 해체하고 리비도적 문명이 오게 되면,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할 시간이 더 많이 찾아올 것이며, 소외된 노동자를 없애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 문화에서는 이런 리비도적 문명이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를 것이라 하기도 한다. 나로서는 로저 케네디가 말하는 리비도적 문명이라는 것에 완전한 동감은 할 수 없으며, 프로이트의 남성 중심적인 심리 이론에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노력하고 있었기에, 책에 완전히 동화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인 프로이트 이론이 갖고 있는 핵심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다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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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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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탁환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를 미치게 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 책을 탐독하는 '열하광'의 <열하광인>들이 살해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살해범을 잡는 것을 끝난다.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면모를 띄고 있으나 또 그렇다고 단정짓기에는 역사적 사건을 맛깔나게 재구성한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근래 들어 유행하고 있는 팩션들을 읽으며, 몇 안 되게 손꼽고 싶은 작품인 것이다. 지인 중에 김탁환을 찬미하는 이가 있어, 그의 작품들을 읽어 보려 마음은 먹었으나 이제서야 그를 접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물론 즐겁게 읽었고, 나 또한 지인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하나 따끔하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몇몇 있기는 하다. 정확히 511개의 주석들이 독자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했고, 그로 인해 자칫 현학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는 주석이 없는 단어들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 있어 어렵기도 했으나 실은 내 무지에 민망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객관적으로 보기에 나뿐만이 아닐 듯 하다. 또한 결말에서 진범을 찾아 내었을 때는 생각지 못함에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황스러웠다. 초반에 단 한 번 등장했던 인물이었던 데다가 독자에게 그 인물에 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추리해 낸다는 것은 억지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허나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옛스러운 단어들의 향연으로 인해 리얼리티를 살려 내었기에 매력적일 수 있었고, 어렵게 느꼈던 탓은 무지의 소치가 아닌가. 더불어 추리 소설을 잘 접하지 않는 내가 그런 결말에 대해 논하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부라 할지라도 현학적인 면모가 비친다는 점, 소설의 몰입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그 탓에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라 하겠다.

 

 <열하광인>을 읽으며 내용적으로 의아했던 점을 몇 꼽자면, 개혁 군주였던 정조가 어째서 백탑파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그들을 최초의 서리로 임명했으면서도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멀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꽃미치광이(花狂)인 김진이 '군왕은 오직 군왕의 도리만을 따른답니다.(하, 246쪽)'라며 자조적으로 내뱉었던 말로써 수긍하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간서치(看書癡) 이덕무가 자송문을 찢어 버리는 장면도 쉽게 수긍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참회로 가득한 자송문을 쓴 것도 나로서는 의아하기만 한 것이다. 개연성의 부족으로 납득하기 힘든 것인지 나의 논리로서만 이해되지 않는 것인지는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말이다. 사실 아무리 어명이라 하더라도 이명방 자신이 속한 열하광을 색출하고 감시하라는 명을 받아 들인 것 자체가, 또 이미 변해버린 정조를 끝까지 믿고 따르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의이지 않던가.

 

 어찌 되었든 간에 <열하광인>에서 등장하는 실존 인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인물, 허구적 인물들의 조화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자연스러웠고,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설정들의 조화도 비교적 훌륭하다.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손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흡인력과 긴박감 또한 감탄할만 하다. 이름만 들어왔던 김탁환을, 백탑파 시리즈의 세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전작들도 접하고 싶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최근에서야 이인로의 <파한집>, 이이의 <동호문답>, 박제가의 <북학의> 등을 읽으며, 우리 고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로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또한 탐독해 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김탁환을 소설가가 되도록 한 시발점이었다는 <열하일기>, 늘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만만치 않은 두께와 가격에 혀를 내두르지 않았던가. 조만간 나 또한 <열하일기>를 탐독하고, 그의 전작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앞선 긴 이야기보다 이 한 줄의 소망만으로도 이 책을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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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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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겨우 두번째 접하는 이순원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약간 달랐달까. 하지만 그것이 실망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따뜻한 면을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그를 깊이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덕분에 이순원을, 아니 정확히는 이순원의 소설을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은비령>에서는 바람꽃을 매개로 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밤나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장 최근에 자연물을 의인화한 소설을 읽어 본 것이 김훈의 <개>였으니,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라 더욱 즐거웠다.

 

- 얘야, 첫 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단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 해를 살다 가는 풀들의 세상에서나 있는 일이란다. (14쪽)

 

 표지에 또박또박 적혀있는 이 구절에 처음부터 마음을 빼앗겨 가벼운 마음으로 또 따뜻한 마음으로 얇지만 무거운 이 한 권을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사실 처음부터 나무가 말을 하리라곤 생각치 않고 책장을 넘겼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나무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빠져 들었던 것이다.

 

 여덟살 난 손자나무는, 냉이에게 왜 수선화처럼 예쁘지 않고 못 생겼냐며 놀렸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하고, 대추나무에게 왜 그리 게으르냐고 핀잔을 주었다가 할아버지의 나무의 말씀을 듣고 창피해 하기도 하고, 작년에 떨어 뜨리고 만 밤알을 아쉬워 해 밤알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 있다가  가지를 잃어버릴 뻔 하기도 하지만 결국 첫 열매를 온전히 익혀내며 조금 더 성장한다. 백살이 넘은 할아버지나무가 손자나무를 잘 이끌어 내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흐뭇하여 즐거워 진다.

 

-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얘기가 그렇다는구나. 산 위의 참나무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자기 짐작에 왠지 흉년이 들 것 같은 해는 일부러 꽃을 많이 피워 열매를 잔뜩 맺고, 풍년이 들 것 같은 해는 꽃을 적게 피워 열매도 적게 맺는다는 게야. / 왜요? / 들농사 흉년이 들면 아무래도 사람이고 짐승이고 먹을 것이 부족할 거 아니냐? 그럴 때 제몸의 도토리라도 풍년이 들게 해서 산 식구와 들 식구의 부족한 식량을 채워 주었던 거지. (154쪽)

 

 다만 안타까운 점은 전형적인 나무의 입장이라기 보다 우리 사람들이 나무가 이런 생각을 하기를 바라는 면면이 투영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아쉽기도 하다. 나무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인간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기에 그런 것으로 그리고 있는 탓이다. 우리가 나무를 해치고, 동물을 해치고, 그리하여 자연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표현이 없어 약간 아쉬웠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일뿐, 그들이 인간에게 득이나 실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허나 그것이 의인화물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덕에 이리도 따뜻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득 할아버지나무와 손자나무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문득 나무 한 그루를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몸을 움직여 세상을 보고 싶다는 손자나무에게, 할아버지나무가 그러기 위해서는 화분 속에 담기는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래도 그것은 싫다고 하기는 하였으나 내가 나무를 키워 보려면 화분에 담아 키우는 수밖에 없기에 은근슬쩍 미안해 진다.

 

 몇 년 전, 친구의 집들이에 행운목을 선물하며, 나도 길러 볼까 하는 마음이 들긴 하였으나 죽여 버리고 말 것 같아 포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그 행운목을 잊지 못하고 길러 보려, 지난번 그것을 샀던 장터에서 어슬렁거려 보았으나 구하지 못했기에, 이 책을 읽다 말고 행운목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매번 식물을 말려 죽이거나 썩혀 죽이기가 허다해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잘 키워 보리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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