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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겨우 두번째 접하는 이순원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약간 달랐달까. 하지만 그것이 실망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따뜻한 면을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그를 깊이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덕분에 이순원을, 아니 정확히는 이순원의 소설을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은비령>에서는 바람꽃을 매개로 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밤나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장 최근에 자연물을 의인화한 소설을 읽어 본 것이 김훈의 <개>였으니,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소설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라 더욱 즐거웠다.
- 얘야, 첫 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단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 해를 살다 가는 풀들의 세상에서나 있는 일이란다. (14쪽)
표지에 또박또박 적혀있는 이 구절에 처음부터 마음을 빼앗겨 가벼운 마음으로 또 따뜻한 마음으로 얇지만 무거운 이 한 권을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사실 처음부터 나무가 말을 하리라곤 생각치 않고 책장을 넘겼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나무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빠져 들었던 것이다.
여덟살 난 손자나무는, 냉이에게 왜 수선화처럼 예쁘지 않고 못 생겼냐며 놀렸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하고, 대추나무에게 왜 그리 게으르냐고 핀잔을 주었다가 할아버지의 나무의 말씀을 듣고 창피해 하기도 하고, 작년에 떨어 뜨리고 만 밤알을 아쉬워 해 밤알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 있다가 가지를 잃어버릴 뻔 하기도 하지만 결국 첫 열매를 온전히 익혀내며 조금 더 성장한다. 백살이 넘은 할아버지나무가 손자나무를 잘 이끌어 내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흐뭇하여 즐거워 진다.
-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얘기가 그렇다는구나. 산 위의 참나무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자기 짐작에 왠지 흉년이 들 것 같은 해는 일부러 꽃을 많이 피워 열매를 잔뜩 맺고, 풍년이 들 것 같은 해는 꽃을 적게 피워 열매도 적게 맺는다는 게야. / 왜요? / 들농사 흉년이 들면 아무래도 사람이고 짐승이고 먹을 것이 부족할 거 아니냐? 그럴 때 제몸의 도토리라도 풍년이 들게 해서 산 식구와 들 식구의 부족한 식량을 채워 주었던 거지. (154쪽)
다만 안타까운 점은 전형적인 나무의 입장이라기 보다 우리 사람들이 나무가 이런 생각을 하기를 바라는 면면이 투영한 것이 아닌가, 하여 아쉽기도 하다. 나무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인간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기에 그런 것으로 그리고 있는 탓이다. 우리가 나무를 해치고, 동물을 해치고, 그리하여 자연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표현이 없어 약간 아쉬웠던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일뿐, 그들이 인간에게 득이나 실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허나 그것이 의인화물의 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덕에 이리도 따뜻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득 할아버지나무와 손자나무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문득 나무 한 그루를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몸을 움직여 세상을 보고 싶다는 손자나무에게, 할아버지나무가 그러기 위해서는 화분 속에 담기는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래도 그것은 싫다고 하기는 하였으나 내가 나무를 키워 보려면 화분에 담아 키우는 수밖에 없기에 은근슬쩍 미안해 진다.
몇 년 전, 친구의 집들이에 행운목을 선물하며, 나도 길러 볼까 하는 마음이 들긴 하였으나 죽여 버리고 말 것 같아 포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그 행운목을 잊지 못하고 길러 보려, 지난번 그것을 샀던 장터에서 어슬렁거려 보았으나 구하지 못했기에, 이 책을 읽다 말고 행운목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매번 식물을 말려 죽이거나 썩혀 죽이기가 허다해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잘 키워 보리라. 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