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문답 - 東湖問答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0
이이 지음, 안외순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얇은 책 한 권에 율곡 이이의 정치사상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에 감탄을 토로하고자 한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알아 본 적도 없다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국폐國幣에 초상화가 새겨질 정도의 훌륭한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소홀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호문답>은 율곡이 선조에게 바치는 '마음'이다. 율곡은 일평생을 선조가 왕도정치를 펼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많은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는 그를 멀리했다.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된 선조로서는 당시 등장한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켜야 했으며, 그 까닭에 의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알다시피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조차 투옥되고 사형의 위기에 몰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왕의 세력이 약화된 때에 너무 강한 지지 기반을 가진 자가 생겨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정도로 의심이 많았던 선조로서는 율곡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율곡은 선조에게 왕도정치를 실현토록 하기 위해 충정을 다하였지만, 선조는 그것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율곡에게 집중시켜 주어야 하고 그를 지지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곡의 성품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율곡 스스로는 아무리 충정을 다하여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의 권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이런저런 요인으로 인해 율곡은 선조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사망 직전에는 높은 관직을 받고, 선조가 그를 신임하였기 때문에 자칫 선조의 애정이 남다르지 않았던가, 하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선조는 탕평을 위해 이 무리 저 무리를 번갈아 신임했던 까탈스러운 인물이기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곡을 멀리하기만 했다. 다만 율곡의 노후에 그를 신임하여 곁에 두려고 높은 관직을 주었으나, 율곡이 이미 늙어 정사를 논하기 힘들어진 탓에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율곡과 선조의 관계는 묘했다. 율곡은 선조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흠모하며 성군이 되시리라 하고 기대하였다. 허나 선조는, 이미 언급했듯이 여러 이유들로 인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율곡은 그런 선조를 두고, 처음과 달리 세속에 물들었다며 비판했다. 율곡은 선조의 눈에 들기 위해 간언을 올리지 않았으며, 에둘러 표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선조를 보고, 있는 그대로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으며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동호문답>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그를 성군이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조의 형식적인 정치에 대해 비판한다. 더불어 좋은 신하를 등용해야 한다며,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임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허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쓴 말은 내뱉고 싶어지는 법이다. 선조는 점점 율곡을 멀리하고, 율곡 또한 더욱 더 과격한 언사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결국 율곡은 그런  출사와 퇴사를 반복한다. 마침내 율곡은 참지 못하고, 경연 석상에서 맹자가 제 선왕에게 했던 질문을 선조에게 그대로 던졌다 한다.

- 지금 민생이 곤궁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온 나라가 다스려지지 못함이 심한데 가령 맹자가 주상께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는다면 주상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허나 선조는 대답하지 않았고, 율곡은 선조를 포기한다. 정녕 선조가 왕도정치를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하는 한탄과 함께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훗날 선조가 그를 신임하지만, 율곡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병중에 있었다. 율곡의 정치 사상은 매우 훌륭하고 또렷했지만, 그것을 이룰 재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율곡은 정치인이기보다 문학자로서 명성을 더 높이 날린다. 

 그는 왕도정치를 행하기 위한 첫번째 방안으로서 입지를, 두번째 방안으로서 무실을 주장하는데 그 부분은 [제 7장 무실務實이 수기修己의 요체임을 논하다]에 잘 드러나 있다. 율곡은 주상(선조)이 '입지志보다 앞서는 것이 없지요.'라고 말한다. 더불어 궁리진성窮理盡性, 신민新民, 형우과처刑于寡妻, 모자토계茅茨土階, 박시제중博施濟衆, 수명예악修明樂이라는 여섯가지를 입지의 세부 항목으로 든다. 즉,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며, 백성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만들며, 아내에게 모범이 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며,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하며, 예악을 닦아 밝히라는 것이다. 더불어 힘써 실천하라는 뜻의 무실을 한다면 선조는 반드시 왕도정치를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율곡은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은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 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즉 선조가 왕도정치를 행할 뜻이 있고, 그것을 실천하기에 있는 힘을 다한다면 당연히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또  좋은 신하를 적재적소에 임용할 것과 충신과 간신을 가려 상벌을 뚜렷이 할 것, 안민정책을 펼칠 것, 교육 정책을 개선할 것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안민정책에 관해서는 과세 제도와 공물 제도의 개선, 공물 대납을 통해 이방들의 횡포 금지, 각 지방마다 다른 부역을 균형잡히게 나눌 것과 가렴주구 근절 등의 상세한 사항방법까지 하나하나 제시한다.

 위에서 본 것과 율곡은 선조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는데, 나 또한 선조와 율곡 모두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냥 한 쪽만을 손들어 주기에는 둘 다의 감정과 행동이 이해되는 탓이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었다. 과연 유교가 그리도 폄하해야 할 대상인가. 나로서는 아직 지식이 짧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겠다. 더군다나 <동호문답>에 등장하는 율곡의 유교적인 가르침은 너무나 미화되어 있어, 이것이 제대로 실천된다면 정말 안민한 세상이 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탓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한다. 율곡의 가르침처럼 각종 제도의 개혁과 가렴주구의 근절 등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만 속세에 물들어, 그것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짧은 지식이라고 하나 장유유서長幼有序, 남존여비男尊 사상 등이 유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난 뒤에 논하는 것이 옳으리라 여기는 까닭이다. 또한, 어떤 이념이든 깊숙한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수긍할만한 논리들로 가득차 있지 않던가. 물론 폐단 또한 어디에나 산재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의 본질을 훼손하고 그릇된 목적에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폐단을 시정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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