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전쟁 : 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4
박대재 지음 / 책세상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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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시작은 더 오래되었지만, 우리가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록이 남기 시작한 이후이다. 즉 역사와 함께 인류는 발전했다. 그 이전까지의 전쟁은 잡다한 유희에 불과했지만, 국가가 형성되고 기록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저자는 이 와중에 의식을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학문의 연구 과정에서 의식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었거나 아예 표명조차 하지 않았지만, 의식을 주요한 요소로 인식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대상의 상징성과 형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구조주의 패러다임에 의해 문화의 상징성이 부각되었는데, 그 이후로 전통적 패러다임을 깨고 모든 사회의 형태에서 의식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의식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 등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단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게 보완, 수정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어 흥미롭다. 또한 저자는 이원론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그 자체가 의식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 하다. 정치와 국가, 즉 사회의 구조와 인자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만 의아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딱히 일원론이나 이원론이라고 구분하기 힘든 애매한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자는 이원론이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나 역시 고대국가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도시국가, 분권 국가, 중앙집권 국가라는 세가지 유형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세가지 유형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왔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하며, 바뀌고 있다는 것이 책의 요점이다.

 

 흔히 고대라고 하면,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권력을 이용한 통제력에 주목하기 십상이지만, 바뀐 방식은 기존의 전통적 방법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와 인자에 중점을 두면서 의식과 혈연집단에 기반을 둔 분권 국가 모델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혈연, 의식, 신앙 등의 이데올로기가 통치 방식으로 작동하는 고대 국가들은 무수히 많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개의 신화에서 미신에 가까운 혈통, 즉 천자(天子)라는 식의 신앙이 그들을 이끄는 수단이다. 또 군주가 제사장을 겸하여 의식을 치르는 등의 경우가 수두룩한 것을 보면, 이는 그처럼 의식이 중요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고대국가는 이처럼 의식과 전쟁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중앙집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분명한 것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고대 국가를 새롭게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매번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지만,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쟁점으로 하고, 어떤 점을 주안점으로 두어야 할 것인지는 세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 갈테지만, 고대인들이 이미 겪었던 것들, 즉 사실들은 패러다임에 맞춰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판결에 상관없이 계속 그 상태로 흘러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바라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문제이지만, 앞선 시대에서는 더욱 선명한 시각을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있지도 않을까.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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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원형을 찾아서 - 고대 그리스 정치 살림지식총서 174
최자영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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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그대로 고대 그리스의 정치를 살펴 보는 책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고대 그리스의 경이로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이를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실질적인 이론 기반을 제시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고대 아테네에 관련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 최자영이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고대에 관련한 역사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정치의 원형을 찾아서>가 눈에 띄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갈수록 빈부 격차가 커져가고,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고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의 우리 사회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이전에는 단 한건도 없었던 개인파산, 회생 신청자가 IMF 이후 급작스럽게 증대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정치의 본모습 또한 그다지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적용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 방법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지만, 기본적인 뿌리 자체는 그대로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개인파산이나 회생 제도는 이미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위해 시행했던 채무말소가 그 원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정치가의 농간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횡행을 예방하기 위해 추첨제를 시행했는데, 그러한 시스템 또한 우리 사회에서 문제시되는 정치가들의 공금 횡령이나 법 위반 등을 방지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그러한 점을 오목조목 잘 짚어내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특히나 솔론의 정치 개혁을 굉장히 중요하게 보고 있는데, TV 프로그램의 제목에 '솔론'이 들어간 것이 있을 정도로 현명한 선택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그의 정치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가 비록 경제인들과 유착하여 금권 정치를 행하기는 했으나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는 유별난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그런 점은 생각해 보면, 그가 단행한 정치 개혁은 여러모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7년이 7번 지나면, 즉 49년마다 부채액이나 넘어간 토지 등을 하느님에게로 되돌려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제도, 그에 따라서 몰수한 재산과 토지들을 재분배했던 제도 등은 현대 사회에서 시행하기에 어려움이 따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시행하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그 재산들을 재분배할 수 있는 제도들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흥미로웠던 점은 전선의 제조나 유지비 등을 부자들에게 부담하게 한 제도였는데, 국고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사회적 부담을 지울 수 있었던 것이 놀랍기도 하며, 옳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 제도에 의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한 부자들을 위해 자신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게 하였는데, 그 상대가 자신보다 재산이 많지 않다고 부인할 경우 '재산 바꾸기 소송' 등을 할 수 있었던 제도 등을 보면 참 재미있다. 물론 재미에 앞서 참 인간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애썼던 솔론의 정치력이 놀랍다. 당시 부유층과 권력자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샀을 것이 분명하지만, 솔론은 옳다고 생각한 자신의 결단이나 정치방법을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분명 무서운 것이지만, 정치판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전쟁들이 일어난다. 그러한 정치의 원형을 찾아 나선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짚고, 그에 대한 여러 대안을 제시하면서 소소한 재미를 준다. 또한 그 대안들이 전혀 요사스럽지 않다. 이러한 복지와 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무력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대안을 찾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러 정책을 통해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차차 어렵게 되어 시민들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연고주의로 인한 정치인들의 잘못이 판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로마제국주의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역사를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던 일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흔히 개인이 일기를 쓰는 것을 권유하는 이유는 기록의 의미도 있지만, 반성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이 개인이 아닌 국가의 기록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로마제국주의를 마냥 비난하는 것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 현실을 캐내어 알고,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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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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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부터 복고가 한창 유행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CM이 생길 정도로 패션도 복고에, 노래까지도 리메이크곡이 인기를 끈다. 걸맞춰 TV드라마도 사극 열풍이다. 뒤따라 팩션도 우리나라의 주류 장르라 할만큼 성장했다. 그 탓에 <뿌리깊은 나무>로 유명한 이정명이 새 팩션을 하나 들고 나왔을 때, 우려도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우려는 나만이 가진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런 우려 속에서 이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정말 기쁨이 컸다. 주인공인 김홍도와 신윤복의 컬러 도판이 화려하게 인쇄된 것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줄거리 또한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덕분에 2권을 다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극과 극이라 할만큼 다른 화풍을 가진 둘의 대결이나 절묘한 반전, 문체 등은 쉬이 이 책을 읽도록 만든다. 특히 10년 전 도화서 참변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라는 정조의 명령을 받든 김홍도의 추리력, 신윤복이 가진 태생의 비밀, 그리고 또다른 비밀, 그가 <바람의 화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은 흥미진진하다.

 

 또한 작가, 이정명이 말하는 그림은 참으로 아름답다.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것과 해설을 곁들여 그림을 보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더욱 새롭다. 학창시절 미술, 국사 시간에 얼핏 스쳐 보았던 그림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고운 선을 가진 그림들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참 안타까울 지경이다.

 

 흔히 좋아하는 그림이 무엇이냐, 혹은 좋아하는 화가는 누구이냐, 라는 질문에 외국 작품과 화가들을 대고는 한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라서 고흐나 세잔, 클림트, 프란츠, 쉴레 등 유명 화가들에 대해 말하곤 한다. 물론 개인적 취향은 절대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화가들에 대해, 그림에 대해 모른 채로 그들만을 추앙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지심이 드는 것이다.

 

-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가령, '저문 강 노을 지고 그대를 그리노라' 라고 읊을 때, 강을 그리는 것은 곧 못견디게 그리워함이 아닙니까. 그림이 그리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얼굴 그림이 되고, 그리운 산이 있으면 산 그림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상권, 17쪽)

 

 책에서, 신윤복은 그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 그림…. 나도 모르게 되뇌이면서 그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정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것은 예술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이나 공간은 어느새 아스라히 스러져 가고, 결국 남는 것은 스스로의 사고뿐이지 않던가. 또한 그것조차 육신의 부패와 함께 이지러질 한 때의 것. 그렇기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것이지만, 정신의 되새김이기에 행복한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남긴 아름다운 그림들처럼, 이정명은 또 한 편의 소설을 남겼다. 이 참에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예술인들이 한없이 부럽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다고들 한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빈 손으로 와서 세상에 잠시 손에 쥐었던 무언가를 남기고 가는 소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나 또한 언젠가는 무언가를 남기고, 홀가분하게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다.

 

 신윤복만이 <바람의 화원>은 아니다. 김홍도 또한 이 세상에 잠시 살다 간 바람의 무언가이며,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바람의 무언가이며, 나 또한 바람의 무언가가 될 것이다. 따뜻한 바람 냄새가 난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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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
김신홍 지음 / 컬처라인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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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차와 튤립의 나라라고 알려진 네덜란드. 하지만 대개 수도인 암스테르담의 지저분한 거리, 홍등가에서 쇼윈도에 서있는 반라의 여인들, 서유럽답게 찌부드드한 날씨, 마약과 섹스가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거리만 돌아보고 오게 된다고 한다. 

 

 저자, 김신홍은 그런 이미지에 대해 벗어 던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들로 네덜란드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단다. 그 곳은 가장 네덜란드적이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즉, 암스테르담은 관광객을 위한 특구일뿐, 네덜란드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네덜란드의 매춘은 합법적인 것이다. 매춘부들은 수입에 대해 세금도 내고 노조도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지 않으면 엄격한 제재를 받고, 정해진 구역 내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생활 곳곳에서, 통제받지 않고 마약을 즐길 수 있다. 단, 중독성이 매우 약한 마약만을 사용할 정도로 스스로 규제하는 사회다. 그래서 중독성이 강한 마약에 중독된 이들을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생각하며, 그들을 교도소가 아닌 병원으로 보낸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관대함이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997년 '국민 건강과 금연을 위한 재단'측은 앞으로 16세가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 학생들에게 3백 길더의 상금이나 그에 상당하는 여행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만큼 청소년 흡연 문제가 공공연하다. 저자는 길을 가다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는데, 주위의 어른들이 야단은 커녕 이상하게 여기는 눈초리 한 번 건내지 않더라고 말한다. 청소년들의 흡연이 공공연한 것을 넘어서서 일반화된 사회인 것이다. 물론 학교 교칙에서는 교내 흡연을 금지하고 있다. 허나 그것은 금연 장소에 관한, 즉 교내에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일 뿐, 청소년이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방관으로 보일 법한 그들의 태도는 네덜란드 사회의 오점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마약, 매춘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지만 범죄율이나 마약 중독자의 수가 인근 국가보다 낮다. 네덜란드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스스로 절제하고 책임질 수 있는 완벽한 자유인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가정 내에서 그런 절제를 엄격히 배우고 자라나기 때문에, 청소년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자세를 취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고등학생만 되어도 두세가지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교육의 열의가 강하다. 하지만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유치원생도 식탁 당번, 설거지 당번, 거실 청소 당번 등을 나누어 할 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 자란다. 특히나 철저한 칼뱅주의에 의해 살아가는 네덜란드인이기에 항상 부끄럼 없이 단정하고 청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몸에 베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독일보다 더 지독한 짠돌이들이 사는 나라라고 하니, 그들의 생활 습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진부하다.

 

 또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북해에 면한 국토의 40%가 바다보다 낮고, 최고지점이래야  해발 321m밖에 안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토를 넓히기 위해 자연과 맞서 싸운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로 대단하다. 그만큼 자연의 혜택을 덜 받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는 저력은 인적자원밖에 없다.

 

-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스스로 네덜란드를 만들었다. (God made the world, but the Dutch made Holland themselves.)

 

 그들은 그 인적자원으로 지금의 네덜란드를 세웠다. 끝없는 자연과의 투쟁으로써. 더군다나 네덜란드의 환경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흡사하다. 국토의 면적이 좁은 것도 그렇고, 인구 밀도가 높은 것도 그러하며, 교육열이 높은 것도 그러하다. 허나 반대로 보면, 우리나라와 지나치게 다르다. 국토의 면적이 좁지만 모자란 부분을 간척지로 넓혀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만든 것이 다르며, 인구 밀도가 높지만 그것을 단점으로 두지 않고 외국 각지로 뻗어 나가는 저력으로 만든 것이 다르며, 교육열이 높지만 우리나라처럼 부모의 강제가 아닌 것이 다르다. 더불어 신랄하고 자유로운 언론,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가 거의 없는 정치가들이 존재한다. 또한 그들은 희멀건(백) 인종답지 않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으며, 한국사회에 만발한 '외모지상주의' 같은 단어는 들어보지도 못했을만큼 신경쓰지 않는다.

 

 오죽하면 저자 김신홍이 네덜란드인은 사시사철 방수재킷 하나로 버티는 사람들이라고 칭할까. 우리나라에서 외모에 대한 칭찬은 매우 유쾌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동시에 의아한 것이라 한다. 누군가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면, 상대적으로 그런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따라서 그들은 외양보다 내면에 힘쓴다. 외양은 자신의 뜻이 아니지만, 내면은 자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 김신홍은 이 책의 제목은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라고 지었다. 강소국(强小國)이라는 것이다. 주변 강대국(强大國), 즉 영국이나 독일, 혹은 미국같은 나라에 비해 전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평한다. 강대국의 국민들은 모국의 강함에 기대어 모국어밖에 할 줄 모를 정도로 타국에 신경쓰지 않지만, 네덜란드인은 스스로 소국임을 인정하며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또한 강대국의 국민들이 모국의 강함에 기대어 타국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치켜 세워 외국인을 차별하지만, 네덜란드인은 누구에게나 관용을 베풀며 차별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장애인도 섹스할 권리가 있다며, 그들에게 섹스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할까.

 

 김신홍도 그렇겠지만, 나조차 네덜란드에 관한 책 한 권만으로 이리도 네덜란드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다름아닌 그 다양성에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더불어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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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살림지식총서 4
김형인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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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us가 두 얼굴을 가진 것인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 두 얼굴을 가진 것인지, 그것에 대해 명확히 따지고 싶지는 않다. 나 스스로 기독교인이 아니며, 성서를 모르며, 인간을 모르는 탓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또 다른 해석을 하는 이가 있으니, 저자 김형인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이 책은 노예제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과정까지, 그것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론과 그 근거까지 설명하고 있다. 미국 노예제의 찬성론자들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노예제를 지속하려 했는가. 혹은 반대론자들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살피고자 하는 것들은, 노예제도의 기술하고 난 후 보여준다.

 

 현재에는 대다수가 노예제를 반대한다. 더불어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라 여기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200년 전쯤의 일이다. 200여년 이전에는 인간에게 계층이 있고, 따라서 인간들을 분류하고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또한 인간은 그것에 익숙했다. 서양에서 휴머니테리어니즘(humanitarianism), 즉 박애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20년대부터였으며, 약 반 세기 후 인간 사이에 평등한 동포애를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노예들의 처우개선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단체가 영국의 동물보호협회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노예들은 동물보다 저급하게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대인들이 얼마나 노예에 대해 무관심했으면, 동물보호협회에서 노예들의 처우개선에 대해 논했을까. 얼마 전, 일데폰소 팔꼬네스의 <바다의 성당>을 읽으며, 노예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에서는 그들의 삶을 더욱 더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짐승만도 못하다 여겨졌던 노예들에 대한 처우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더욱 가혹했던 것은 다름아닌 기독교인이었다.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그들을 부려먹는 것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것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보고 그에 근거한 해석을 한 것이었기에 실효성을 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함의 저주를 보면,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또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라는 부분, 레위기의 '그들이 너희 소유가 될지니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라는 부분도 그들에게 근거를 뒷받침한다. 더욱 지독한 것은 베드로 전서이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다면, 노예는 당연히 있어야할 것이었다는 말이다.

 

 노예제 반대론자 또한 성서를 인용하기는 매한가지다. 마태복음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부분이 있고, 출애굽기를 보면 '사람을 유괴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노예제를 반대할 근거로 삼는다. 더불어 사도행전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우리가 그의 소생이니라'라는 부분을 인용하며, 모든 인간은 한 혈통이므로 형제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데, 사실 이는 찬성론자들이 성서에서 인용한 부분에 비하면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찬성론자들은 인류의 모든 족속이란 백인들만은 지칭하는 것이며, 흑인들은 애초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자로써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서를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면, 찬성론자들에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들은 인간이 아니라 가축 이하의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주인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누군가 노예를 죽이더라도 그것은 살해가 아니라 노예의 주인이 가진 재산의 손실로 여겨져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날 뿐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형성하고, 지키기 위해 노예가 필요했다. 따라서 노예들을 노예로써 유지하도록 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으며, 그것을 성서에서 찾았으며, 법적 근거에서 찾았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백인들에게 우월한 텍스트를 찾기에 앞장서, 백인 노예들을 풀어주며, 자유 흑인까지도 노예 흑인으로 만들며 그들의 이익을 지켰다. 처음에는 백인과 흑인 모두 노예가 있었으나 결국 흑인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흑인=노예'라는 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결국 법 테두리내에서 자유 흑인조차 노예 흑인으로 만들 방법을 고안해 냈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말씀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보는 성경무오설에 따라 노예제를 찬성하게 되는데,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의 형성에 대해서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노예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근본주의가 더욱 더 박차를 가한 것인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노예제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 중 그 누가 야누스인지 알아낼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두가지에 대해 정확히 구분할 입장도 되지 못할 뿐더러,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교를 믿지 않으며, 기독교가 아닌 다른 그 어느 종교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다. 즉, 신을 향한 절대적 믿음보다 인간의 상대적 이성에 호소하고 싶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가 잘못되었듯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 잘못되었든, 그 구분을 정확히 가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것을 비도덕적으로 분간하는 기준은 인간에 의한 탓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둘의 상관관계가 매우 짙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며, 따라서 그 모두가 인류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당위적인 것이리라 확신한다.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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