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살림지식총서 4
김형인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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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us가 두 얼굴을 가진 것인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 두 얼굴을 가진 것인지, 그것에 대해 명확히 따지고 싶지는 않다. 나 스스로 기독교인이 아니며, 성서를 모르며, 인간을 모르는 탓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또 다른 해석을 하는 이가 있으니, 저자 김형인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이 책은 노예제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과정까지, 그것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론과 그 근거까지 설명하고 있다. 미국 노예제의 찬성론자들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노예제를 지속하려 했는가. 혹은 반대론자들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는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살피고자 하는 것들은, 노예제도의 기술하고 난 후 보여준다.

 

 현재에는 대다수가 노예제를 반대한다. 더불어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라 여기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200년 전쯤의 일이다. 200여년 이전에는 인간에게 계층이 있고, 따라서 인간들을 분류하고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또한 인간은 그것에 익숙했다. 서양에서 휴머니테리어니즘(humanitarianism), 즉 박애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20년대부터였으며, 약 반 세기 후 인간 사이에 평등한 동포애를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신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노예들의 처우개선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단체가 영국의 동물보호협회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노예들은 동물보다 저급하게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대인들이 얼마나 노예에 대해 무관심했으면, 동물보호협회에서 노예들의 처우개선에 대해 논했을까. 얼마 전, 일데폰소 팔꼬네스의 <바다의 성당>을 읽으며, 노예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에서는 그들의 삶을 더욱 더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짐승만도 못하다 여겨졌던 노예들에 대한 처우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더욱 가혹했던 것은 다름아닌 기독교인이었다.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그들을 부려먹는 것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것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보고 그에 근거한 해석을 한 것이었기에 실효성을 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함의 저주를 보면,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는 구절이 있다. 또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라는 부분, 레위기의 '그들이 너희 소유가 될지니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라는 부분도 그들에게 근거를 뒷받침한다. 더욱 지독한 것은 베드로 전서이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다면, 노예는 당연히 있어야할 것이었다는 말이다.

 

 노예제 반대론자 또한 성서를 인용하기는 매한가지다. 마태복음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부분이 있고, 출애굽기를 보면 '사람을 유괴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노예제를 반대할 근거로 삼는다. 더불어 사도행전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우리가 그의 소생이니라'라는 부분을 인용하며, 모든 인간은 한 혈통이므로 형제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데, 사실 이는 찬성론자들이 성서에서 인용한 부분에 비하면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찬성론자들은 인류의 모든 족속이란 백인들만은 지칭하는 것이며, 흑인들은 애초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자로써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서를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면, 찬성론자들에게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들은 인간이 아니라 가축 이하의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주인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누군가 노예를 죽이더라도 그것은 살해가 아니라 노예의 주인이 가진 재산의 손실로 여겨져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날 뿐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형성하고, 지키기 위해 노예가 필요했다. 따라서 노예들을 노예로써 유지하도록 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으며, 그것을 성서에서 찾았으며, 법적 근거에서 찾았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백인들에게 우월한 텍스트를 찾기에 앞장서, 백인 노예들을 풀어주며, 자유 흑인까지도 노예 흑인으로 만들며 그들의 이익을 지켰다. 처음에는 백인과 흑인 모두 노예가 있었으나 결국 흑인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흑인=노예'라는 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결국 법 테두리내에서 자유 흑인조차 노예 흑인으로 만들 방법을 고안해 냈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말씀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보는 성경무오설에 따라 노예제를 찬성하게 되는데,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의 형성에 대해서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노예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근본주의가 더욱 더 박차를 가한 것인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노예제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 중 그 누가 야누스인지 알아낼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 두가지에 대해 정확히 구분할 입장도 되지 못할 뿐더러,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교를 믿지 않으며, 기독교가 아닌 다른 그 어느 종교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다. 즉, 신을 향한 절대적 믿음보다 인간의 상대적 이성에 호소하고 싶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가 잘못되었듯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 잘못되었든, 그 구분을 정확히 가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것을 비도덕적으로 분간하는 기준은 인간에 의한 탓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둘의 상관관계가 매우 짙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며, 따라서 그 모두가 인류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당위적인 것이리라 확신한다.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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