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진주
이시다 이라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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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주같은 여자 사요코와 진주를 알아 본 남자 모토키와의 사랑 이야기다. 잠들 뻔 했던 사요코의 진주는 모토키의 믿음과 사랑으로 다시 깨어나게 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7년이라는 나이차는 그들을 쉽게 다가설 수 없도록 만들지만, 여러 사정으로 결국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주변의 압박과 스스로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이어갈 수 없는 사요코는 모토키를 밀어내려 하고 불륜 상대인 다쿠지의 도움으로 성공하게 된다.

 

 사랑을 잃은 사요코는 판화 일에 몰두한다. 모토키 덕분에 얻은 아이디어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검은 사요코'라는 별명은 어느덧 '흰 사야코'로 변하게 될 정도로 판화가로서 성공을 맞게 된 사요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그는 그 곳에서 모토키를 만나게 된다. 사요코와 모토키의 살앙을 비꼬던 다쿠지는 그 둘의 사랑에 감복했던 것인지 모토키가 한 오해를 풀어 주고, 사요코가 있는 곳을 알려 준 것이다. 잠에 빠지려던 진주를 일깨운 것이다.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사요코는 그로써 '빛을 내면으로 끌어 들여 소중하게 간직하는 진주'로서의 면모를 재확인한다. 타히티의 찌그러진 흑진주알과 함께, 그들의 사랑도 내면으로부터 빛을 내뿜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이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나로서는 의문이다. 처음부터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던 그 사랑이 결국 꽃처럼 활짝 피어 오르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내 답은 부정적이다. 결국 파멸하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나뿐만이 아니리라. 한번쯤 꿈꿀법한 사랑에 대한 환상과 그 믿음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사랑을 과연 진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또 그 사랑이 영원함을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말이다.

 

 허나 영화 감독 지망생인 모토키가 찍은 아름다운 사요코를 직접 보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또 그렇기에 영상으로 만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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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서태후
펄 벅 지음, 이종길 옮김 / 길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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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지금은 기억이 흐릿해져 다만 색감이 마음에 들었던 영화, 라고만 기억하고 있다. 서태후가 그 영화에 등장했었다는 기억이 가물할 정도로 그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은 그닥 많지 않았다. 악평이 자자하다는 것, 그리고 희대의 악녀였다는 것.

 

 책 표지에 '펄벅은 이 한 편의 글에서, 실제적 인물의 가장 소설적이고 가장 사실적인 부분을 절묘하게 혼합해 놓은 새로운 전기를 선보인다.' 라고 써져 있다. 허나 <연인 서태후>에서는 그를 지나치게 미화시킨 감이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아마 그 또한 인간이기에 당연히 가진 것이리라. 그렇기에 펄벅은 이것을 상상할 수 있었고, 또 이 책을 써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화시킨 탓에 이 책을 그대로 믿을 독자들 또한 있으리라는 생각에 조금 섬뜩해 진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실제 그는 함풍제의 사랑을 받지도 못했으며, 처음부터 황비도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책을 통해 일개 궁녀(책에서는 귀인)였던 그가 태후가 되기까지, 그리고 태후로서의 삶을 만족하지 못하고 여황이 되려고 했던 그의 욕심은 그저 사랑의 힘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책에서 그는 영록에게 '나는 냉혹하지 않습니다. 다만 외로울 뿐이에요.' 라고 말할 정도로 그 괴로움을 호소했다. 아마 서태후의 삶에서 그 괴로움은 전생애를 통해 쭉 그를 좇아 다녔을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사람보다 지나치게. 하지만 그것이 가차없이 철권을 휘두르고, 매 끼니마다 백여가지의 산해진미를 탐하고, 수백가지 고급 의복과 보석들을 휘두르고,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여 이화원을 지었던 것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끼니마다 그가 먹었던 산해진미를 돈으로 환산하면 일만 백성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쌀의 값이다. 이 하나의 예만으로도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이화원을 짓기 위해 광서제를 핍박하고, 그를 가두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모든 외로운 사람들이 그토록 잔인해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 이 픽션의 백미는 군기대신 영록이다. 저자 펄벅은 친척 오라비로 영록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서태후의 연인이자 정혼자였지만, 서태후의 야망으로 내버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서태후는 태후의 자리를 차지하며, 그를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린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가. 서태후는 끝까지 영록이 자신을 위해 희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결국 영록의 일시적인 변심으로 인해 상처 받는다. 결국 영록의 마음은 서태후에게 돌아 오지만,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매 한가지이다. 서태후는 어떻게 단 한 번의 결합으로 인해 영원히 영록만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내버린 사랑이 자신을 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것일까. 또한 영록은 왜 끝까지 서태후에게 충성했으며, 자신의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란 것인가. 혹 사랑이란 것인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러한 서태후로서도 그 야망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결국 황제도 황후도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자금성의 정문은 그 둘만이 드나들 수 있었지만, 서태후는 단 한 번도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48년이나 청을 지배했지만, 결국 그는 그저 여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서태후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측전무후처럼 황후가 되지도, 여황이 되지도 못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그의 야망보다 사랑을 더 부각시킬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그는 권력과 사랑 중에 권력을 택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한다. 그토록 원했던 권력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며 외로워했던 것이다. 심지어 사랑을 나누었던 영록조차 그에게 냉정했으니, 그가 사랑받기를 절실히 원했던 것은 당연한 심리일 것이다. 그렇기에 온후한 성품으로 주변의 사랑을 받은 동태후 사코타에게 질투심을 느꼈으며, 결국 그를 살해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의 야망을 더 부각시켰더라면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다.

 

 허나 이미 <연인 서태후>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기복을 매끄럽게 연결하지 못한 것과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쉽긴 했으나, 실제 손에서 내려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흡인력이 강했다. 같은 동양문화권이지만 이국적인 분위기와 더욱 드라마틱하게 짜놓은 서태후의 일생이 독자를 끌어 당기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읽는 내내 측은지심이 들어 그를 옹호하게 되기도 했으니까.

 

 그의 잎새같은 눈매와 앙다문 입술이 선명히 떠오른다. 마치 고독했지만 열정적이었던 그의 인생처럼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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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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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허술한 경비와 늦장 대책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불법이주민 9명이 사망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의 환대가 아니라 눈물이었다. 그나마도 눈물로서 위안을 받은 고인들은 다행이다. 합동분향소에 찾아 오지 못한 가족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왜 제 나라를 떠나 가족의 소식도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하며 돈을 벌러 나와야 했을까. 우리는 왜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찾아 온 그들에게 멸시의 눈빛과 욕설을 보내야 했을까.

 

 이와 같은 참상을 겪는 것은 <엔리케의 여정>에 등장하는 불법이주민들도 별다르지 않다. 사회와 경제적인 구조 체계가 가난을 생산해내는 나라에서 태어난 그들이라고 해서, 그것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면서 부터 행운을 얻은 아이들에게 마냥 분노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엔리케의 여정>은 탄생했다.

 

 엄마, 라우데스에게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던 벨키와 엔리케는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의 삶을 살아간다. 벨키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편, 엔리케는 엄마와의 이별을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방황한다. 결국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일곱번에 실패 끝에 도착하게 된 엔리케의 여정은 결코 해피엔딩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여전히 수 많은 라우데스가 가족을 떠나 미국을 향하고, 수 많은 엔리케가 엄마를 찾아 뒤따른다. 미국은 착취와 통제로 약소국을 조종하면서 본국의 손해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반응한다. 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하고, 인종차별로 외면하기도 하고, 적은 수당으로 착취하기도 한다.

 

 미국 또한 이러한 구조적 폐해를 바꾸지 않는 바에는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장기적인 투자를 하기에 적합한 긍정적 의욕조차 애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들을 잡아내 돌려 보내면 그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찌 괘씸한 이기주의라 욕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다. 엔리케의 여정은 그렇게 우리의 모순적인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게다가 결코 동화처럼 해피엔딩만 부르짖을 수도 없다. 만약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 내려 했다면, 눈물의 재회 장면으로 끝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22일 동안 고생 끝에 엄마와 재회한 엔리케는 며칠만에야 엄마에 대한 이상향이 실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11년이란 세월은 그들을 진정한 애정으로 묶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말다툼을 하게 되고, 울음에 겨워 서글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변명하기에 바쁘다. 결국 엔리케의 여정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이 오해를 풀어 내고, 진정으로 서로를 위안하려는 날은 아마 제법 먼 후일이 될 것이다.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는 것이다. 그것이 엔리케가 겪은 고난의 여정만큼이나 씁쓸하고 안쓰럽다.

 

 허나, 아직도 이 책이 소설인지 논픽션인지 기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L.A. 타임즈의 기사를 바탕으로 썼다고는 하지만, 모호하기 짝이 없다. 퓰리처상을 보도 부문에서 탄 것인지 문학 부문에서 탄 것인지도 명확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 퓰리처상 홈페이지에 들어가 2003 수상자 명단에서 feature writing 부문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내 착각, 즉 책으로 엮어져 나왔기에 문학의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 오류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번역기를 사용한 듯한 조악한 문장과 잘못된 어조사, 오자와 탈자, 불분명한 수식어들이 거슬려 읽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로 인해 같은 문장,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책의 표지나 속지, 도비라 등의 재질이 고급스러운데 비해, 내용물의 질은 부실하여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출판사의 '세심한 배려'의 부재가 필요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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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눈사람
조영훈 지음 / 마음향기(책소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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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색 눈사람 있어. 그래서 아무리 햇볕에 내려쬐어도 안 녹아.

 

 어린 유희는 마찬가지로 어린 친구들에게 말한다. 정화는 그 말에 동조한다. 그리고 초록 눈사람은 마침내 소나무 위에서 빛난다. 유희와 선우의 어린 딸 꽃별의 눈에서 반짝 반짝. 어린 날, 지지 않는 상록수와 같은 색깔을 칠하면, 마찬가지로 녹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유희에게서 탄생한 초록 눈사람이, 다시 빛나는 순간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두 부부가 서로에게 숨기며, 딸 꽃별이를 서로에게 맡길 생각으로 안심한다. 하지만 부부 모두 말기 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 사이에서 서로의 친구인 정화는 부부 모두에게 비밀을 숨겨 주다가, 마침내 꽃별이를 자신이 맡겠다고 나선다. 꽃별이는 초록 눈사람을 보며 웃는다. 언젠가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믿음을 갖고.

 

 당연히 절망과 두려움의 심리 묘사를 위주로 나갈 줄 알았던 <초록 눈사람>은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병을 받아 들이는, 이해할 수 없는 심리를 선보인다. 잠깐의 절망과 고뇌를 갖고, 후에는 결국 가망 없는 수술과 치료를 거부하고 말미를 서로의 손을 잡고 오도카니 죽음을 기다린다. 더군다나 유희가 먼저 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복선은 너무나 선명해서, 복선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유희의 병을 알게 된 선우가 오열하여도 전혀 놀랍지 않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오히려 병을 담담하게 받아 들인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뇌를 표현하는 것이 부족해 안타깝다.

 

 남은 시간을 가족과의 행복함으로 위장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할 일을, 그리고 앞으로 혼자 남겨질 꽃별에게 홀로서기 준비를 시킬 뿐이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유희의 아픈 가족사도 글 속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겉을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다. 선우와 유희가 재회하는 장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느낌이다. 장편 속에 여러 단편을 우겨 넣은 것처럼 철저히 겉핥기식으로 맴돈다. 그래서 특별한 감동이 없다. 그저 묘한 운명일세,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심리 묘사를 위주로 표현하였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또 단란한 세가족의 일상, 예를 들어 꽃별이를 가정부의 품으로, 또 보육원으로 보내곤 했던 시절의 유희의 후회스러운 지난 날을 유희의 가족사 대신 확대해 보여 주었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듯 하다.

 

 게다가 부부는 살고 싶어하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말미에서 유희가 병의 증세가 심해져 헛소리를 하듯 내뱉는 것 외에는 살고 싶다, 는 말보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할까, 라는 부부의 대화가 중심이다. 도피하듯 말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오히려 살고 싶어, 내가 왜 죽어야 해, 라고 말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아쉬움도 미적지근하게 다가온다. 죽음이 닥쳐 온 사람들이 가진 심리 묘사와 그에 따른 여러 아쉬움들이 무작정 밀려 들어오는 것을 표현하기에 작가의 역량이 너무 작지 않나, 싶다. 조영훈에게는, 각 장면의 적절한 전환을 소설로 빚어 내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일면, 시나리오였다면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속극 극복 공모에 당선하였다는 작가의 이력을 보고 나니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

 

 이럭저럭 아쉬움이 큰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 말만은 공감한다.

 

- 웰빙(well being)이라는 말이 있듯 웰다잉(well dying)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것도 거기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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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가족
권태현 지음 / 문이당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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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끔, 눈물이 났다. 어릴 적 읽었던 김정현의 <아버지>만큼 펑펑 쏟아 낼 눈물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찔끔거리게 되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내 가정 때문에. 평이한 문체와 간혹 어울리지 않는 묘사와 비유가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일단 전체적인 서사가 너무나 씁쓸하게 와닿았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쯔음이었나. 그 때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던 집안에서 나름대로 잘 컸다, 라고 스스로 대견해 하곤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가정의 불화와 날벼락같이 떨어진 빚더미, 우왕좌왕하며 전전했던 월셋방들이 아직도 눈 앞에 선명하다. 지금도 전연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여전히 나는 어리고 약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돌이켜 보고 후회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탓일까. 눈물이 글썽해 졌다.

 어린 날의 치기와 용감무쌍하게 부모에게 대들며 삿대질까지 했던 한심한 꼬마를 기억한다. 아마 부모님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끝내 풀어드리지는 못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면 또 씁쓸하다. 아직까지 죄송하다, 는 말 한마디조차 못 하고 끙끙거리고 있는 내가 답답하기도 하다. 다예와 석진의 삐뚤린 행동과 마음을 읽으며 얼마나 욕을 해댔던지. 하지만 그 시절의 꼬마가 떠올라 비난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송구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아, 답답도 하여라. 다예와 석진의 외침에 오버랩되던 그 꼬마의 울부짖음, 그리고 막연한 불안과 막막한 현실 속에 절망하며 시우에게 비난을 퍼붓는 지은의 눈물에 오버랩되는 어머니, 아무데도 답답함을 토로할 길이 없이 죄책감에 고개 숙인 시우의 절망에 오버랩되는 아버지. 단 한 번도 착한 자식인 적이 없었던 그 꼬마에게 미안해진다. 그리고 안쓰러운 마음에 안아 주고 싶다.

 문득 라는 김윤아의 노래가 떠오른다. 열일곱, 또는 열셋의 나, 상처 투성인 그 앨 안고 다정히 등을 다독이며, 사랑한다 말 하고 싶어. 어쩌면 이제는 그 꼬마를 다독여 가며, 내 잘못을 시인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싶다. 마음 안의 분노도 불안도 그저 내버려 두면 넘쳐 흘러 갈거야. 그럴 거니까. 어쨌든, 덕분에 힘이 났다. 아직 세상의 따뜻함을 맛 보지 못 했으니까, 앞으로 겪어 갈 인생은 아름답지 않을까. 내가 하기에 달렸을 거라, 믿고 싶다. 인생의 굴곡이란 말을 벌써 써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인생의 굴곡이지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이 굴곡은 언젠가 다시 올라갈 때가 있다는 말이다. 시우가 결정내린 것 처럼 그 굴곡이 갑자기 낭떠러지가 되었다고 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결국 시우는 병원에서 눈을 떴지만, 그리고 그 선택 덕분에 가족의 마음이 돌아 섰지만, 꼭 그런 식으로 했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양귀자의 말처럼, 이 소설에서 기교는 도리어 가식이 된다. 어쩌면, 가식없이 핵심을 뚫은 정공법이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진짜 삶이다. 기교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삶을, 나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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