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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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는, 마치 비가 내리듯, 번지듯 빛나는 하얀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두 별이라고 생각하면 이유도 없이 슬펐다. 올려다보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득 메운 별의, 수억개의 빛남. 왜 그런 기분이 들어? 다 그런 거야? 어렸을 때, 아빠에게 물었다.…응.…너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인간은 슬퍼져.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보게 되면, 혹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이상하게도 인간은 슬퍼진다. 야요이는 그것이 다가올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며 <슬픈 예감>에 빠져든 것이다. 하지만 슬픈 것은 예감이었을 뿐, 결과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캐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다. 그렇기에 엷은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온다. 어쨌든 그들은 <슬픈 예감>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 나는 운명이란 것을 내 두 눈으로 보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줄어들지는 않았다. 늘어날 뿐이다. 나는 이모와 동생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손발로 언니와 애인을 발굴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야요이이니 말이다. 물론 이렇게 받아들이기까지 마음을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예감에 몸서리쳐지는 경험도 겪고, 부모를 잃은 아픔을 되새겨야 했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이 조금 일렀을 뿐. 그렇기에 그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그 삶의 존재를 기억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야요이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고, 마침내 제 삶의 의미를 회복한 것이다. 충격으로 잃어버린 기억도, 돌려받은 기억도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요이는 제자리가 어디인지 명확히 할 수 있었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데츠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매, 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기뻐할 수 있었던  남동생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잊었던 추억을 되찾아, 이모였던 언니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잔잔한 필치로 또 때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표현해낸 것이 <슬픈 예감>이다.

 

 이제 야요이는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을 괴로움이 아닌 행복함으로 마음껏 누리리라.

 

- 말도 없이 없어지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내내 곁에 붙어서 간병을 하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육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경우를 몇 번이나 봤다. 우연이란 그런 거야. …만약, 야요이 네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사고를 당해서 엄마나 아빠가 입원하거나 죽었다면, 야요이……. …전화 한 통의 무게에 짓눌려 평생을 고통스러워 하게 된다고.

 

 야요이는 성장을 거듭할 것이다. 엄마의 성실한 태도를, 그리고 그 이전에 깔린 안타까움을 느낀 것처럼.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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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 시간을 초월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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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년을 주기로 돌아오는 사자자리 유성군은 이미 지나갔다. 매년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한 시간에 천개씩 흘러 내리는 그것을 보기란 힘들 것이다. 한 사람의 삶 동안 한두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것을 이제서야 알고, 또 그것을 불과 몇 년 전, 그리고 몇 달 전에 놓쳤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이제 내 삶에 그 기회는 한 번이 남았을까, 두 번이 남았을까, 혹은 한 번도 남지 않았을까. 그리고 스무살의 겨울 밤, 그것을 보았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진작에 이것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 가을과 겨울을 무척 고대하며 보내었었겠지. 오히려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리셋은 사자자리 유성군을 함께 볼 수 있었던 행운을 가진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무려 한 생을 초월한 그것. 시간을 초월해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일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사랑은 행복해 보였다.

 

 전쟁은 아이러니다. 그것은 언제나 평화를 지향하지만, 그것이 일어남으로 인해 평화는 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도 우정도 모두 아이러니하다. 그러면서도 굳이 일본은 극장 폐쇄 명령을 내린다. '이런 비상시에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비상시에 사랑을 하는 사람은 국민도 아닌 것인가. 그래서 유코의 오빠는 구타로 죽어버린 것일까. 시간이 날 때 마다 방공호를 정비하고, 수업 대신 근로동원을 해야하는 어린 학생들을 상상하기에 이 시대는 너무 곱게 자란 것인가.

 

 구름을 가른 햇빛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강도로 경사길을 비췄다. 나는 그 빛이 낙하하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우리는 지금, 멸망의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더 애틋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슈이치는 죽었다. 그의 죽음에 오열을 토했던 소녀는 이제 소녀가 아니다. 성인이 되어 슈이치를 닮은 소년을 만나지만, 그가 슈이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결국 슈이치를 일깨우고, 놀란 마스미는 그를 피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무라카미는 슈이치의 삶을 끌어 안고 살아가다 환생한 마스미를 다시 만난다.

 

 하나의 생을 뛰어 넘어 만난 그들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두 개의 생을 모두 끌어 안느라 이도 저도 아닌 괴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만났다. 마치 운명적인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외치는 듯 말이다.

 

- 그래서 모르는 거야. '중경重慶'이라고 해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국에서의 폭격 뉴스를 보거나 하면서 용맹스럽다고 생각했어. 연기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도 못했지. 전차가 달리거나 군함이 포격하는 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어. '아사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라고 하니 중국 사람도, 필리핀 사람도 모두 우리에게 감사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조선 사람의 심정도 생각하지 않았어. 이겼으면 지금도 그랬을 거야. 궁핍함 역시 알지 못했지.

 

 난사하는 총과 포격하는 군함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는 어린 아이가 과연 죽음을 알까. 하지만 그들은 환호한다. 또 짓밟고 나아간다. 시대가 그것을 가르쳤다. 그런 가르침 하에서 자란 아이들이, 거리에서 장난감 총을 들고, '죽어라'라고 외칠 때, 나는 너무 괴로웠었다.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희생한 많은 이들을 떠올려 본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 많은 인류.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의 전쟁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바로 우리, 그리고 내가 매일을 전쟁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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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아나키즘
노암 촘스키 지음, 이정아 옮김 / 해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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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만큼 편견에 휩쌓여 본질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 사상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정부는 통치기구 전체, 혹은 내각만을 가르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법(질서와 규칙)을 만들고 실행하며, 그것을 어길 경우 처벌을 가하는 기구이다. 이러한 정부가 없는 상태, 즉 무정부주의가 뜻하는 의미가 잘못 전달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촘스키의 말처럼, 오판된 이유가 권력의 어두움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으나, 단어 그 자체에서 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무정부주의, 즉 정부가 없는 상태, 그러니까 질서와 규칙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 책의 3장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에서 질문자 또한 그렇게 묻는다.

 

- 내년 1월 1일에 지금까지 있던 정부가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 즉 경찰도 없고 도로교통법이나 그 어떤 법률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금 징수원이나 우체국같은 것들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 분명 경찰이 없다는 말은 맞을 겁니다. 그러나 도로교통법까지 없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무정부주의란 문자 그대로 정부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권력이 상부가 아닌 하부에서 발생하는 사회를 뜻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일터와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조직과 관리의 두가지 양식에 대해서 논한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평의회 조직망과 이보다 상위 조직으로 공장이나 각 산업 지부 혹은 수공업까지 전체 산업을 대표하는 대표단 그리고 더 나아가 지역단위와 전국단위 그리고 국제적으로 조직된 노동자평의회 총회이다. 그리하여, 지역별로 연합된 형태로서 연맹과 같은 형태를 갖춘 전국적인 차원 이상의 관리체제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이즈음하여 무지한 독자는 골머리를 앓게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불가해한 것이다. 무정부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는 설명과는 달리, 아예 무지한 나로서는 어렵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이상의 설명은 분명한 견해를 제시하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명할 때가 잦았다. 이 책의 전체를 들어 보았을 때, 그는 대충의 이론적 성격과 느낌만을 제시하고, 그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라 칭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얼핏 이해할 수는 있으나, 의문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무정부를 외치면서, 정당이 출현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고도 말한다. 국가를 이용해 무정부주의의 핵심인 자유를 더욱 평등하게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무정부주의가 단시일내에 실현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사안으로 생각하고 차차 무정부주의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 듯 하다.

 

 또한 무정부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성선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할 수 있다. 워드와 마찬가지로 촘스키도 인간의 기본적인 선함과 고귀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높이 산다. 또한 그것만이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큰 무기라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정확하게 옳고 그름을 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 즉 전제 자체가 무리인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선설(性善說)이나 성악설(性惡說),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모두가 진실 혹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설이기 때문이다.

 

- 견실한 무정부주의자라면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와 이런 개인 체제를 지탱하는 임금 노예제를 반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노동이 자율적으로 생산자의 관리 하에 수행되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난다. ……견실한 무정부주의자라면 소외된 노동뿐만 아니라 자칫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노동의 전문화라는 말에도 반대해야 한다. 노동의 전문화는 생산수단의 거듭된 발전으로 말미아아 노동자를 단편적인 존재로 격하시켜 단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러한 견해를 소개하며 이 폐해를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한 가지 특징으로 간주했으나, 사회주의 또한 그와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터이다. 또한 정부가 주도하는 생산조직에 반대한다고 하였으나, 결국 또 다른 특권층을 만들어 그들에게 그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율적인 생산자들의 자율적인 연합체'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 치켜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제적인 착취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노예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의아해진다.

 

 특히 공감했던 부분 중 하나는 'Devil take the hindmost 체제' 라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통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과연 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라는 철학적 의문이 든다. 이것이 인본주의적 생각에 바탕한 것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들어 맞으리라. 듀이는 인본주의적 생각이란, 생산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조건에서 서로 협력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물론 생산도구가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강압적인 체제 하에서 평등을 찾기란 근본적으로 힘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야망에 눈이 멀어 기를 쓰며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

 

 촘스키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분명 18세기나 19세기, 혹은 그 이전과도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닥 변한 것이 없다. 변한 세상에서 변한 것은 물질이지 정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분명 이러한 근본적 문제는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단편적인 지식으로 그러한 것을 논의하거나, 비판을 가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허나, 미국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처럼 '혼자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다고 하여 자유의지적 사회주의, 혹은 실용적 무정부주의 등 그 많은 사상에 대해 정통한 것이 아니기에 옳은 대안인지에 대한 의견을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말처럼 평등과 자유가 실현된 사회가 아니라는 것, 노예 상태에 놓여져 억압받고 탄압받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차차 구체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 본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 첫 발걸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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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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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케네디는 말햇다.

 

- 나는 부랑자나 깡패의 생활 내부에 숨겨져 있는 인간성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 인물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갈 때 비로소 극한적인 설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구석진 곳에 무엇이고 번득이고 있는지를 발견하기 시작하지요. 그게 바로 작가가 사물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초현실주의적인 것, 인생의 신비로운 요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작가의 삶 속에는 신비로운 것이 너무나 많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 더욱 그 화려한 존재를 드러내지요.

 

 때때로 나는 이러한 사람을 비난한다. 도대체 극한에 가서야만 진심어린 인간성을 볼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애매하다. 그리고 꼭 그렇게까지 만들어야 했나, 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물론 문학이기에, 그러한 설정을 거리낌없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분명 밑바닥에서 헤엄치며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그럴 수 있으나 개개의 사정으로 인해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체가 못마땅한 것이다. 왜 인간을 있는 그대로에서 보지 않는가.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자신의 내면에 대해, 스스로도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꼭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 또한 내 개인의 성향이며, 나의 신념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니, 이만 접도록 하자. 서로의 모든 것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물론 이견은 존재하며, 언제나 그 이견 또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허나 과연 나 스스로 그러한 바탕에 가정을 세우지 않고서도 이러한 물음에 대한 진솔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확실히 답할 수 없다. 죽음과 삶, 폭력과 평화라던가 살인과 전쟁, 오해와 비극이라던가 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 어떤 위대한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은 눈을 통해 들어온다고 했단다. 그러니까 암만 많이 보고 싶어도 이 세상을 너무 많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아름다우니까.

 

 이 책의 주인공, 프랜시스는 분명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으나, 그 삶 속에도 웃음과 기쁨은 존재한다. 그 아이러니가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며, 동시에 인간 근원의 내면인지도 모른다. 부자와 거지가 공존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하는 이 시대의 존재가 바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윌리엄 케네디는 바로 그러한 점에 착안해 이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이라,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랜시스는 몇몇 살인 끝에 지금의 자신에 대해 애석하기도 하지만,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치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22년의 삶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그 속에서도 분명 웃음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이면에 죽음이 있듯이 비극 이면에 희극이 존재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원제 : 억새풀)>에서는 그 삶의 이면과 운명을 숭고한 의미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좋아하지 않는 극한에서의 삶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으나, 분명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느꼈다.

 

 역자 장영희는 이 책에서 희망을 느꼈다고 했다. 삶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은 타인이 보기에 보잘 것 없고 역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은 은하수가 어딘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빈 위스키병과 달이 만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희망 아닌가.

 

- 프랜시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는 달과 병이 만들어 내는 음악 소리에 다시 귀 기울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 더이상 거기 누워 있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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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 신들의 보물에서 반지전설까지,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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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유럽, 즉 게르만 신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에 속하는지 몰랐던 탓이리라. 알아 보고자 하는 마음에 펼친 이 책은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잇는 것이었다. 오딘의 '발할의 성'이나 세계수 '이그드라실', 저주가 걸린 '니벨룽의 반지', 인간 영웅 '지크프리트',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 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이라. 각종 게임과 오락 프로그램, 영화 등 문화산업에 널리 쓰이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라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많았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식이 탄로 났다고 할까. 그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정체를 몰랐다니. 책의 내용만 기억하고, 책의 제목을 기억 못하는 경우가 많은 나로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면서도 놀라운 마음은 가실 길이 없었다.

 

 세상은 이그드라실의 뿌리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북유럽의 신화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로서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최근 10년간 속속들이 출간된 판타지 소설의 경우, 세계수 이그드라실을 주요한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사상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서로 나누어져 있는 여러 세계가 이그드라실이라는 물푸레 나무에 의해 의지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무는 자연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기에, 자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계라는 사상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딘이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까닭에 이그드라실에 창으로 꽂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하는 사실 또한 흥미롭기는 매 한가지이다. 자연에서 나고 자연에게 돌아가는 그 당연한 순리가 이그드라실의 존재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딘이 눈 한 쪽을 잃고 지혜를 얻은 것이나, 거인 미미르가 몸뚱이를 잃고 샘물에서 지혜를 지키는 것은 신화 자체로,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도 설득력이 있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 질량보존 법칙, 이것은 또 자연의 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으로도 나아간다. 자연의 섭리는 이처럼 냉혹한 것이다.

 

 이 진리는 불의 신 로키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지독한 장난꾸러기에 말썽꾼이지만, 그가 일으킨 말썽은 언제나 그가 해결한다. 또한 황금열망에 유일하게 자극받지 않는 신으로, 오딘이나 토르 등에게 보물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가 준 선물이 고마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그의 장난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키는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으나 과정상의 문제 때문에 신들의 세계에서 항상 환영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의 본질적인 내면에 관한 문제인 것으로도 보인다. 그렇기에 라그나뢰크에서도 거인들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 혹은 조롱과 냉소 덕분에 그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오딘은 그와의 무수한 여행과 많은 언행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의 언사에 대해 냉랭하지 않았던가. 물론 오딘의 경우, 그것은 아들 토르에게도 마찬가지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신들의 행동은 타당성이 있기도 하고,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신들의 언행이기 때문에, 또 타당성을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들이 인간적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렇기에 그들의 최후는 장엄하다.

 

- 마침내 해와 달이 늑대에게 먹혔다. 지축이 흔들리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해일이 일어났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두려움에 떨었다.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서로 물고 뜯고 먹고 먹힌 끝에, 세계는 끝이 났다. 신의 최후로 인해, 인간이나 난장이, 요정들 그 외 모든 것이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기적같이 해와 달이 새로 태어나고, 몇몇 신들과 인간 한 쌍이 살아 남았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들판, 하늘, 바다, 호수, 그 모든 것이 푸르렀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를 보라.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지혜만을 숭상한다. 그것도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과학의 기술일 따름이다. 또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였지만, 그것은 영원한 뫼비우스의 띠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잘못은 또 우리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북유럽신화는, 라그나뢰크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기독교인이 되어버린 시인들이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고는 하였으나, 그것의 이면에 깃들여져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아직 곳곳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는 이렇게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우리에게 새로운 발상을 제공해 주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무시하는 지나친 해석력과 여러 관점을 막아버리는 단호한 판단력이 안타까웠다. 다시 말해,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멍하게 주입을 당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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