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 신들의 보물에서 반지전설까지, 시대를 초월한 상상력의 세계
안인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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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유럽, 즉 게르만 신화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그에 속하는지 몰랐던 탓이리라. 알아 보고자 하는 마음에 펼친 이 책은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잇는 것이었다. 오딘의 '발할의 성'이나 세계수 '이그드라실', 저주가 걸린 '니벨룽의 반지', 인간 영웅 '지크프리트', 최후의 전쟁 '라그나뢰크' 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이라. 각종 게임과 오락 프로그램, 영화 등 문화산업에 널리 쓰이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라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많았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식이 탄로 났다고 할까. 그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정체를 몰랐다니. 책의 내용만 기억하고, 책의 제목을 기억 못하는 경우가 많은 나로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면서도 놀라운 마음은 가실 길이 없었다.

 

 세상은 이그드라실의 뿌리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북유럽의 신화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로서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최근 10년간 속속들이 출간된 판타지 소설의 경우, 세계수 이그드라실을 주요한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사상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서로 나누어져 있는 여러 세계가 이그드라실이라는 물푸레 나무에 의해 의지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무는 자연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기에, 자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계라는 사상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딘이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까닭에 이그드라실에 창으로 꽂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하는 사실 또한 흥미롭기는 매 한가지이다. 자연에서 나고 자연에게 돌아가는 그 당연한 순리가 이그드라실의 존재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딘이 눈 한 쪽을 잃고 지혜를 얻은 것이나, 거인 미미르가 몸뚱이를 잃고 샘물에서 지혜를 지키는 것은 신화 자체로,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도 설득력이 있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 질량보존 법칙, 이것은 또 자연의 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으로도 나아간다. 자연의 섭리는 이처럼 냉혹한 것이다.

 

 이 진리는 불의 신 로키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지독한 장난꾸러기에 말썽꾼이지만, 그가 일으킨 말썽은 언제나 그가 해결한다. 또한 황금열망에 유일하게 자극받지 않는 신으로, 오딘이나 토르 등에게 보물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가 준 선물이 고마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그의 장난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키는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으나 과정상의 문제 때문에 신들의 세계에서 항상 환영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의 본질적인 내면에 관한 문제인 것으로도 보인다. 그렇기에 라그나뢰크에서도 거인들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 혹은 조롱과 냉소 덕분에 그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오딘은 그와의 무수한 여행과 많은 언행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의 언사에 대해 냉랭하지 않았던가. 물론 오딘의 경우, 그것은 아들 토르에게도 마찬가지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신들의 행동은 타당성이 있기도 하고,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신들의 언행이기 때문에, 또 타당성을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들이 인간적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렇기에 그들의 최후는 장엄하다.

 

- 마침내 해와 달이 늑대에게 먹혔다. 지축이 흔들리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해일이 일어났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두려움에 떨었다.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서로 물고 뜯고 먹고 먹힌 끝에, 세계는 끝이 났다. 신의 최후로 인해, 인간이나 난장이, 요정들 그 외 모든 것이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기적같이 해와 달이 새로 태어나고, 몇몇 신들과 인간 한 쌍이 살아 남았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들판, 하늘, 바다, 호수, 그 모든 것이 푸르렀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를 보라.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지혜만을 숭상한다. 그것도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과학의 기술일 따름이다. 또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였지만, 그것은 영원한 뫼비우스의 띠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잘못은 또 우리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북유럽신화는, 라그나뢰크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기독교인이 되어버린 시인들이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고는 하였으나, 그것의 이면에 깃들여져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아직 곳곳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는 이렇게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우리에게 새로운 발상을 제공해 주었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무시하는 지나친 해석력과 여러 관점을 막아버리는 단호한 판단력이 안타까웠다. 다시 말해,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멍하게 주입을 당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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